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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밥

현실의 밥’ 얻기 위한 생활인 슬픔
‘밥’의 희망을 떠올리게 하는 역설

신종호 webmaster@kyeonggi.com 노출승인 2018년 09월 11일 20:20     발행일 2018년 09월 12일 수요일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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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연

세월이 가는 걸 잊고 싶을 때가 있다.
한순간도 어김없이 언제나 나는 세월의 밥이었다.
찍소리도 못하고 먹히는 밥,
한순간도 밥이 아닌 적이 없었던,

돌아보니 나는 밥으로 슬펐고,
밥으로 기뻤다.
밥 때문에 상처받았고,
밥 때문에 전철에 올랐다.
밥과 사랑을 바꿨고,
밥에 울었다.
그러므로 나는 너의 밥이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2008.

네덜란드의 생물학자 미다스 데커스(Midas Dekkers)가 쓴 ‘시간의 이빨’은 제목이 무척 강렬하다. 그는 시간을 ‘이빨’을 지닌 생명체로 의인화함으로써 우리가 시간에 의해 먹히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의 표현에 빗대어 생각하자면 인간은 ‘시간의 밥’인 셈이다. 시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이빨자국을 우리 몸에 남긴다. 늙음과 쇄락과 죽음이 그 흔적이다. 미다스 데커스는 시간의 입에 넣어져 씹히는 삶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늙음은 결코 실패가 아님을 강조한다. “쇠약해진다는 것은 얼마나 멀리 여행했는지를 알려주는 시계”와 같은 것이며, 죽음은 몰락이 아닌 완성이라고 말한다. ‘시간의 이빨’은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의 파괴”라는 믿음이 만든 삶에 대한 유려한 보고서라할 수 있다. 그렇지만 죽음이 아름다움의 완성이라는 그의 말에 선뜻 동감하기는 어렵다. 죽는다는 운명의 수락보다 살아야 한다는 현실의 당위(當爲)가 더 다급하고 생생하기 때문이다.

허연 시인의 시 ‘밥’은 ‘세월의 밥’으로서의 인간의 운명과 ‘현실의 밥’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해야하는 생활인의 슬픔을 나란히 진술하고 있어 더욱 깊게 공감이 된다. 세월에게는 “찍소리도 못하고 먹히는 밥”의 신세이며, 현실에서는 ‘밥 때문에’ 울고 웃어야 하는 화자의 애달픈 처지는 밥벌이로 삶을 영위하는 생활인들의 실존과 삶을 표상한다. ‘세월의 밥’이라는 실존의 운명보다 ‘밥’에 울어야 하는 현실의 참담이 우리를 한없이 슬프게 한다. ‘밥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고, ‘밥 때문에’ 꿈과 사랑을 놓치는 곡절의 시간이 ‘지금-여기’의 생활이다. 그래서 시인은 “세월이 가는 걸 잊고 싶을 때가 있다.”라는 말로 생활의 야속을 자조(自嘲)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속담처럼 먹고살기 위해 ‘전철’에 오르는 억지의 시간이 한없이 먹먹하기만 하다. ‘밥’을 미끼로 우리의 꿈과 사랑을 낚아채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나는 너의 밥”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이 세계의 삶은 참혹하다.

허연 시인의 시 ‘밥’은 밥의 희망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밥의 슬픔을 온전히 다 드러냄으로써 밥의 희망을 생각하게 만드는 역설로 읽혀진다. 그 역설의 의도는 “그 어떤 위대한 일도 밥 한 그릇에서 시작된다.”는 박노해 시인의 말과 상통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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