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원폭피해자의 악몽

Scroll down
1919년 일본의 식민지배에
저항하고자 온 겨레가
한반도를 태극기로 물들였던

‘3·1 운동’ 102주년.

1919년 일본의 식민지배에 저항하고자 온 겨레가 한반도를 태극기로 물들였던 ‘3·1 운동’ 102주년.

당시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선조들의 외침은 26년이 흘러 결실을 맺었다. 독립의 결정적 계기가 됐던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으로 한반도에는 해방의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만세 소리 뒤편, 고통 속 몸부림치며 우는 이들이 있었다. 일제의 총칼 앞에 강제 징용돼 원폭 투하의 희생양이 됐음에도 국내의 냉대와 무관심 속 76년간 숨죽여 살았던 원폭 피해자와 그 후손들의 이야기다.

대를 잇는 아픔...

언제쯤 멈출까

원폭피해 2세 환우’들의 실상을 처음 세상에 알린 고 김형률씨가 세상을 떠난 지 17년이 흘렀지만 피해자 후손들은 여전히 고통속에 눈물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현행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에 원폭 피해 2·3세에 대한 지원 근거가 담기지 않아 개정 요구가 거세게 일고 있지만 정치권의 발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경기일보가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분석한 결과, 지난 2005년 당시 17대 국회의원이던 강기정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원자폭탄피해자의 진상조사 및 지원대책 촉구결의안’을 대표발의한 이후 원폭 피해자에 대한 지원 방안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후 17·18대 국회에서 여러 의원들이 원폭피해자 지원 특별법을 발의하며 법제화에 나섰지만 대부분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한 채 임기만료 폐기됐다.

원폭피해자 지원 특별법이 새로운 전기를 맞은 건 지난 19대 국회였다.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전신) 소속이던 이학영 의원(군포) 등이 각각 발의한 원폭피해자 지원 특별법이 2016년 5월1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71년 만에 법제화 성과를 냈다.

특별법은 ▲한국인 원폭피해자 지원위원회 설치 ▲한국인 원폭 피해자(1세대) 실태조사 ▲원폭 피해자 의료지원 ▲위령탑 조성 등이 핵심이다. 하지만 원폭 피해자 2·3세에 대한 실태조사와 지원 등의 내용은 포함되지 않으면서 원폭 피해자 및 후손들의 개정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사진만 남은 원폭 1세대...

핏줄로 이어진
병마 고통

“나라가 힘이 없어 국민이 강제징용돼 원자폭탄 피해를 입었는데 당연히 나라에서 치유를 해줘야 할 것 아니오”

평택시 비전동 한국원폭피해자협회 기호지부 사무실은 낡고 스산한 분위기를 내뿜는 폐건물에 위치해 있다. 1975년 강제징용 1세대들이 원폭피해에 대한 국제사회 책임을 묻고자 십시일반 돈을 모아 마련했던 이 공간은 외롭게 투쟁해 온 1세대 대다수가 세상을 떠나 더 이상 과거의 결기를 찾을 수 없다.

건물 외벽 페인트는 벗겨진 지 오래고, 틈새 사이로 연신 시멘트가 떨어져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사무실 내부는 찢긴 창호문 사이로 찬바람이 불고, 난방이 되지 않는 바닥은 차디찬 냉골로 발을 디딜 수도 없었다. 주방은 수돗물이 끊겨 그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고,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화장실 악취로 사무실 전체는 매캐한 냄새로 가득 찼다. 협회가 활발히 활동했던 1990년대에는 이 사무실에 매일 30여명이 모여 회의를 했지만 이젠 아무도 찾지 않는다.

'검은 비' 쏟아지던 그날,

내 삶도 검게
물들었죠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고통은 70년이 넘도록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강제징용돼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노동력만 착취당하다 영문도 모른 채 원자폭탄의 희생양이 돼야 했다. 당시 원자폭탄 투하를 직접 현장에서 겪었던 원폭 피해자 1세대들은 이미 대부분 사망했거나 건강이 악화돼 요양원에 있다.

경기도·정부,
원폭피해자 지원 나섰다

2020년 1월 단 한 차례 열린 뒤 개점휴업상태였던 경기도원폭피해자지원위원회가 이르면 2021년 3월 중순 다시 문을 연다.
지난 2019년 경기도의회에서 원폭피해자 지원 조례가 마련됐음에도 지원이 실행되지 않았던 가운데, 이번에는 실질적인 지원이 이뤄질지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경기도와 경기도원폭피해자협의회는 최근 경기도청에서 경기도원폭피해자지원위원회 회의 재개와 위원회를 통한 피해자 지원 방향 등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밝혔다.

한국인 원폭피해 기술

역사교과서
1종 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국내 중·고교 한국사 교과서 14종 중 한국인 원폭피해를 기술한 교과서는 단 1종도 없고, 고교 한국사인 지학사에서 원자폭탄 폭발 사진에 한국인도 원폭 피해를 보았다고 1줄 설명해 놓은 것이 전부다. 청소년들이 공교육을 통해 원폭 피해 내용을 학습할 방법은 전무하다는 지적이다.

경기일보가 국내 중학교 역사 교과서 7종과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8종을 분석한 결과, 한국인 원폭피해를 상세히 기술한 교과서는 없었다.

지학사에서 발행한 고교 교과서에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 폭탄’이라는 사진의 설명으로 ‘일본에 강제 동원된 많은 한국인도 원자 폭탄으로 피폭 피해를 보았다’고 37자 기술된 것이 전부다.

경기도교육청,
'한국인 원폭피해'
교육 나선다

경기도교육청이 원폭피해 교육자료 및 탐방프로그램 개발 등을 통해 ‘한국인 원폭피해자’ 재조명에 나선다.

이는 국내 중·고교 한국사 교과서 14종 중 한국인 원폭피해를 상세 기술한 교과서가 전무(경기일보 16일자 1면)한 데 따른 것으로 경기도교육청은 도내 청소년들이 공교육에서 원폭 피해 내용을 학습할 수 있도록 역사교육 자료 등을 개발한다는 방침이다.

21일 경기도교육청에 따르면 도교육청은 도내 중ㆍ고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인 원폭피해 현황 및 배경 등을 학습할 수 있는 원폭피해 교육자료 개발 및 탐방 프로그램 개발을 추진한다.

경기도, 원폭피해자

3세대까지 지원…
전국 최초

경기도가 사회적 냉대와 무관심 속 76년간 숨죽여 살았던 원폭피해자와 그 후손들의 눈물을 닦는 종합대책을 수립했다.

경기도는 원폭피해자 후손들에 대해서도 지원이 필요하다는 경기ON팀의 연속 보도 후 전국 최초로 지원 대상을 3세대까지 확대키로 해 원폭피해자 지원의 새로운 지평을 열 것으로 기대된다.

도는 23일 경기복지재단에서 ‘경기도원폭피해자지원위원회’를 열고 원폭피해자 지원 계획을 결정했다.

원폭피해 지원 넓힌 경기도 대책… 전국 확산 기대

경기도가 원폭 피해자와 그 후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마련한 종합대책이 타 광역자치단체의 ‘선제적 모델’로 삼아질지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도가 전국 최초로 원폭피해자에 대한 지원 범위를 3세대까지 확장하면서 원폭피해지원 대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는데, 이 같은 광역자치단체 차원의 조치가 의미 있다는평가를 받고 있어서다.

현재 국내 원폭 피해자 지원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경남 합천군에서는 원폭 피해자 사무실, 원폭 기념관 운영비 지원, 원폭 자료 전산화 작업 등 다양한 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광역자치단체 차원에서의 원폭 피해자 지원은 1세대로 지원 범위를 한정하거나 지원사업이 근거 마련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경기도 원폭피해자 지원 계획: 의료지원, 문화·휴양시설 지원 등

원폭피해자 1세대 정정웅씨

“그늘 가려진 우리들… 경기도 3세대 지원확대 감개무량”

“그늘에 가려져 있던 원폭피해자들을 위한 지원이 이뤄진다니 한줄기 희망의 빛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원폭피해 1세대인 정정웅씨(81)는 일본 히로시마에 거주하던 지난 1945년 8월 6일 원폭 피해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당시 6살이었던 정 옹은 폭심지에서 2㎞가량 떨어진 집안에 부모님, 두명의 누님과 함께 있던 중 폭풍에 집이 무너져 건물 잔해에 깔렸다. 어머니가 가까스로 그를 끌어내면서 나무와 함석에 몸이 쓸렸고, 무릎과 등에는 당시의 상흔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후 방공호에서 피난민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던 정정웅씨는 고국에 돌아와서도 가난과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고통의 삶을 감내해 온 정 옹은 현재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서울지부장을 맡아 경기도는 물론 서울과 인천, 강원, 충청, 전라도 지역의 원폭피해 1세대들을 관리하며, 정부와 지자체의 원폭피해자 지원을 이끌어 내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다.

  • 글_ 이호준·송우일·최현호·김승수·이광희·손원태
  • 사진_ 윤원규
  • 편집_ 이은지·이윤제
  • 구성_ 박화선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