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가치 높은 유산현장] 근대문화유산 속 역사이야기
[광복 70년, 가치 높은 유산현장] 근대문화유산 속 역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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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끝에 교각 아래, 살아숨쉬는 한민족의 삶이여…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면서 우리 민족의 고난과 시련이 시작됐다.

무려 35년동안 사회ㆍ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민족을 말살시켜려는 일본의 핍박 속에서 힘든 삶을 이어갔다.

돌아보고 싶지 않은 아픔과 치욕의 역사다. 1945년 광복 후 우리는 아픈 기억을 잊기 위해 당시의 건축물과 근대 유산을 서서히 지워나갔다.

일제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논리가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 속에 녹아있는 힘든 삶 속에서 따뜻한 정을 나눴던 우리 민족의 삶도 함께 사라졌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를 조명하고, 그 속에서 간신히 숨쉬고 있는 당시의 삶과 이야기를 되살린다.

고양 강매동 석교
독립염원 안고 달리던 발걸음… 붉게, 스러지다
지역민과 동고동락 100년의 세월 고스란히
서울·만주 오가던 독립투사 비극의 기록도


고양시 덕양구 강매동. 각종 농작물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로 가득차 있다.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을 제외하고는 인적도 드물다.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와 풍경이 사뭇 다른 이곳에는 1920년에 지어져 95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강매동 석교’가 위치해 있다.

“이 석교는 마을 주민들의 희노애락이 담겨 있어요. 전해져 오는 이야기도 많아요. 정 많던 우리 민족의 따뜻한 이야기부터 일제강점기 시절 비극까지 다양합니다.”

정동일 고양시 문화예술과 역사문화재 위원의 말이다. 총길이 14m, 폭 4m에 이르는 이 석교는 발견 당시 다리의 3분의 1정도 파손된 채 방치돼 있었지만 1990년대 초 복원해 현재는 온전한 형태를 갖췄다.

석교는 인근 지역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교통로였다. 생계를 위해 농산물이나 땔감을 서울 염천교로 가서 거래해야 했는데 이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먼 길을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만 오면 석교 아래로 흐르는 창릉천이 범람해 건너기 위험한 다리로 변했다. 이럴 때는 정많은 마을 주민들이 나섰다.

“사람들은 물이 범람하면 소리를 질러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밤이고, 새벽이고 가리지 않고 도움을 줬죠. 이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지금도 인심 좋기로 유명해요.”

일제 강점기를 거쳤던 만큼 가슴 아픈 사연도 많다. 고양 서부에서 서울을 오가는 시간을 단축시키는 핵심 교통로였던 만큼 주민 외에 독립운동가들도 많이 이용했다. 서울과 만주를 오갈 때 인적이 드물고, 이동거리가 짧은 이 석교는 유용했다. 하지만 일본 순사들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다리 근처에 잠복하고 있다가 독립운동가들이 지나가면 체포하곤 했다.

“다리 앞에 있는 야산 중턱에 동굴이 하나 있어요. 석교와는 20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주변에 나무들이 많아 잘 보이지 않아요. 석교보다는 위쪽에 있어 내려다보기에는 딱이죠. 민족의 아픔이 서려있는 곳이에요.”

현재 역사의 아픔이 담겨 있는 이 석교는 지난 1999년 고양시가 향토문화재 제33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2013년에는 근대문화유산을 보호하는 제도인 등록문화재로 신청했다. 현재 문화재청의 실사 점검, 시의 자료 보완을 마쳤고,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신지원기자

평택 성공회 대안리교회
한옥에 올린 십자가… 동·서양 위대한 ‘공존’
·외부 다른 풍경…도내 유일하게 보존
독립투사 이택화 선생의 ‘신도사랑’ 서려


평택시 현덕면 대안리.

평택 도심에서 꽤 떨어진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이곳에는 1936년에 지어져 우리의 80년 역사를 안고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옥 건물이 있다. 바로 성공회 대안리교회다.

“성공회 교회의 특징은 겉모습이 우리의 한옥 구조와 똑같다는 겁니다. 경기도에 이런 양식으로 지어져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 평택 성공리교회가 유일합니다.”

최수재 대한성공회 대안리교회 신부의 말이다. 내부는 보와 포를 드러낸 천장이 특징적인 바실리카 양식으로 유럽 성당의 이미지가 그려지지만 한옥구조인 외부에서는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는 십자가가 아니라면 교회라는 사실을 알아채기 힘들다.

현재는 처음 교회가 지어졌을 때에 비해 많이 변형됐다. 하지만 건물 내무 천장에 있는 나무에 여전히 ‘일천구백삼십육년육월구일입주상량’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이 글자처럼 건물이 가지고 있는 80년 역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교회 건립을 주도한 분이 독립운동가 이택화(1884~1974) 선생이세요. 1919년에 지역에서 3ㆍ1운동을 주도하신 분이었죠. 1920년까지는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내는 모금책으로 활동하시기도 했어요.”

이택화 선생이 교회 설립을 주도한 건 신도들을 위해서였다. 평택 안중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던 당시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대안리에서 안중까지 걸어서 교회를 오던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대안리 교회 건립에 나섰다.

이 교회가 세워지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또 있다. 대안리는 당시 구진마을이었는데, 이곳은 한 씨 집안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현재 교회가 들어선 곳도 한 씨 집안의 땅이었다.

“한 씨 집안의 며느리이면서 당시 신도였던 박월매 씨가 땅을 기부해 교회가 들어설 수 있었어요. 더 고마운 건 10여년 전 쯤에 한 씨 집안이 기부한 땅의 주소가 교회가 세워져 있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예요. 당시에는 주소 정보가 정확하지 않아 발생한 일이죠. 하지만 한 씨 집안에서 현재 교회가 들어선 땅도 추가로 기부했어요.”

현재 이 건물은 성공회 재단에서 소유ㆍ관리하고 있다. 평택시와 경기도는 지난 2013년 이 건물의 역사적ㆍ건축학적 가치를 인정해 문화재청에 등록문화재 등재를 신청했지만 변형이 심해 등록 가치가 미흡하다고 판단해 부결됐다.

신지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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