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여는 역사의 門 해방 70년 京畿] 27. 임천택(林天澤)과 쿠바에서의 항일운동
[미래를 여는 역사의 門 해방 70년 京畿] 27. 임천택(林天澤)과 쿠바에서의 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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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독립의 꿈 품고… 이역만리 쿠바서 ‘구국항쟁’ 이끌어
▲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임천택의 묘.

지난 9월6일은 대전의 국립현충원의 임천택의 묘소에서는 조출한 기념식이 거행됐다.

동학의 뒤를 이은 천도교단에서 행한 임천택 선생 30주기 추모식이었다. 임천택. 생소한 이름의 그는 일찍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쿠바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로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라는 3등급의 높은 훈장을 받으신 분이다. 구한말 수많은 사람들이 조국을 떠나 해외로 이주했다.

개중에는 새로운 신천지를 찾아 떠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생계형 이주였다. 당시 해외 이주는 대부분이 만주지역이었으나 특별히 이역만리인 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

하와이와 멕시코, 쿠바 등으로 떠난 이들은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다른 민족이 일하기를 꺼려하던 사탕수수밭에서 노동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임금의 일부를 모아 중국의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내주었고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식을 잊지 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백범 김구도 그 은덕을 거명할 정도로 독립에 지대한 공이 있는 해외의 대표적인 독립지사가 임천택이다.

■ 어린시절의 아메리카 이주
임천택은 경기도 광주에서 1903년 3월19일 출생했다. 그에 대한 아버지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순탄한 가정 출신은 아니었을 것이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던 그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멕시코행 배를 탄 것은 겨우 3살 때인 1905년이었다.

멕시코 이주는 1905년 4월4일 인천항을 떠나면서 시작됐다. 당시 멕시코는 사탕수수산업으로 세계의 시장을 독점했다. 특히 한인이 처음으로 이주한 유카탄 반도 지역은 사탕수수 재배에 적합한 토양과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에 이를 수반하는 값싼 노동력이 절실했다.

초기에는 인디언들이 채무노예로 노동력을 제공했고 아시아에서는 중국, 일본의 노동자들이 진출했다.

그러나 유카탄 사탕수수 농장의 일은 매우 위험하고 고되었기 때문에 중국인과 일본인에서는 점차 기피했다. 이에 그 대안으로 떠오른 곳이 한국이었다. 한국인의 근면성이 그곳에까지 소문이 난 것이다.

1904년부터 ‘황성신문’에 ‘농부모집광고’라는 광고를 통해 공개적으로 이민자 모집에 나섰다. 이들은 서울을 비롯해 인천, 개성, 평양, 진남포, 수원에 각각 대리점을 두고 모집했다.

그 결과 1천여명을 모집하는 등 적지 않은 호응을 얻었다.(임천택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모집된 인원은 총 1천33명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멕시코에 가서 “4년 기한만 채우면 금은동화를 한 짐씩 짊어지고 귀국해 안락생활을 할 수 있다”는 소문에 솔깃했다고 한다.

이처럼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초기의 해외 이주는 대부분 잠시 동안이라는 인식 하에서 이루어 졌다. 임천택의 어머니의 경우도 비슷한 생각에서의 출발이었을 것이다. 그들 일행이 우여곡절 끝에 인천항에서 배에 오른 것은 4월 초순이었다.

50여일 항해 끝에 멕시코에 도착한 이주 노동자를 맞이한 것은 ‘희망과 꿈’이 아니라 살인적인 더위와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임천택은 멕시코에서 힘겨운 생활로 어린시절과 청소년기의 15년을 보냈다. 그러나 처음 4년을 기한으로 왔지만 궁핍한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고 다시금 주저앉아 사탕수수 노동자(애니깽) 생활을 반복하기를 거듭했던 것이다.

당시 임천택은 보다 좋은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갈 준비가 되었는데 마침 쿠바에 먼저 갔던 한인들의 추천으로 쿠바를 향했다. 3백여 명이 쿠바로 재이민을 떠났는데 그 때가 1921년 3월 25일이었다.

그렇지만 쿠바의 생활 역시 멕시코와 별반 차이 없이 여전히 고달픈 생활이었다. 임천택은 쿠바의 마탄사스로 이주하고 정착했는데 이곳이 쿠바 한인사회의 기반이 됐다.
 

▲ 독립운동가 임천택 선생이 쿠바에 세운 한글학교.

■ 쿠바의 천도교 종리원
쿠바에 정착한 임천택은 그 성실함으로 인하여 농장주에게 인정을 받게 됐고 이를 계기로 마탄사스는 한인들의 근거지가 됐다.

정착한 임천택은 이후 들어오는 한인들과 농장 측과 교섭에 앞장서서 좋은 결과를 맺음에 따라 한인들의 생활은 점차 나아져 갔다. 이후 한인들은 칼데나스, 하바나 등으로 이주하면서 활동무대를 넓혀나갔다.

이로써 쿠바에는 마탄사스를 비롯해 칼데나스, 하바나 등지에 한인사회가 형성됐다. 당시의 쿠바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직접 미치는 곳은 아니지만 여전히 일제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한인사회가 형성된 곳이면 어김없이 일본영사관에서 찾아와 한인의 등록을 요구했다.

그러나 쿠바한인들은 단호히 거부하고 일제의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한인단체를 결성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21년 6월14일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를 조직했다.

쿠바지방회는 광복사업 구제금 모금, 교육사업 등을 비롯해 1923년 3월1일에는 독립선언기념행렬을 갖기도 했다. 임천택은 1922년 7월 쿠바지방회 서기로 선임된 후 평의원, 총무, 학무원, 집행위원장, 위원장, 고문 등을 역임했다.

임천택의 본격적인 민족의식 형성에는 1927년 잡지 ‘개벽’을 발행하던 개벽사 직원인 이두성과 서신 연락을 하면서부터였다. 이 시기 임천택은 ‘개벽’을 구독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두성이 천도교에 입교할 것을 권유했고 1928년 4월 1일 천도교에 입교했다. 당시 천도교는 3.1운동을 주도한 이후 국내 민족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어느 단체보다도 민족의식이 강하고 항일의지도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임천택은 1930년에는 칼데나스에 천도교 쿠바종리원을 설립했고 지난 1933년에는 천도교청년당 당원으로 입당했다. 이듬해 1934년 3월8일 임천택은 도호로 덕암(德菴), 부인 김귀희는 당호로 성숙당(誠淑堂)을 각각 수여받았다. 이후 임천택은 쿠바에서의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

■ 쿠바에서의 독립운동
쿠바 종리원은 앞장서서 구국의 항일운동에 적극 나섰다. 비록 직접 일제와 싸울 수는 없었지만 쿠바의 한인들은 조국을 위한 일에 너와 나가 없었다.

임천택 등 쿠바한인들은 국민회 지방회를 통해 1937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360.52원, 1940년 말부터 41년 초까지 78.30원, 그리고 1941년 10월부터 12월까지 858.88원을 모금해 재미국민회와 중경임시정부 김구에게 송금했다. 이러한 송금액이 이후 독립운동의 종자돈이 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했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미국ㆍ멕시코ㆍ쿠바가 제위로 만여 명인데 그들 대다수가 노동자였지만 애국심이 강했다.(중략) 쿠바의 임천택, 박창운 등 모두가 임시정부를 후원해 주었다.(중략) 쿠바의 한인 교포는 전부가 정부 유지 발전에 공동책임을 지게 되었다”고 밝혀 임천택 등의 도움에 감사를 표하고 있다.

또한 이 시기 쿠바한인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는 한글교육이었다. 쿠바지방회는 1923년 민성국어학교를 설립하고 후원하다가 1932년 지방회 직속 기관으로 전환한 후 모든 운영비를 제공했다. 임천택은 1925년부터 3년 동안 교사로, 1931년부터 5년간은 교장으로 활동했다.

이외에도 임천택은 야학강당을 개설하고 한인노동자와 2세를 위한 한글교육을 1942년까지 지속했다.

▲ 독립운동가 임천택 선생.

뿐만 아니라 임천택은 한인의 장래는 한인에 달려 있다는 취지로 1932년 3월10일 청년학원을 설립했다. 임천택은 청년학원 원장 겸 교사로 교육사업에 전념했다. 이 청년학원은 2년 만에 문을 닫았지만 한국역사강연회를 비롯해 토론회, 동화회, 독서회 등 90여 회의 모임을 갖고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배양했다.

이외에도 임천택은 1938년 대한여자애국단 쿠바지부가 설립되자 고문으로 추대됐으며 그의 지도 아래 광복군을 후원하기 위해 1전 모금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한인들에 대한 감시가 심해졌다.

당시 쿠바는 미국과 우호관계였기에 일본의 진주만 습격 이후 일본영사관을 강제 철수시켰다. 그리고 쿠바정부는 일본과 혼용해 한인들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이처럼 상황이 급변하자 마탄사스 지방회 전권대표를 맡고 있는 임천택은 그동안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기록을 보이며 해명을 했고 체포명령은 취소됐다. 이후 그는 쿠바 정부에게 한인의 신분 보장, 일본에 대한 공동 항일전쟁 수행 등을 요구하는 등 한인사회를 위한 일에 헌신했다.

■ 쿠바에 울린 아리랑
해방 후 조국과 다시 연결을 시도했던 임천택은 분단과 전쟁, 거리상의 어려움 그리고 1959년의 쿠바혁명 등이 겹치면서 그 끈은 끊어지고 말았다.

결국 항상 조국을 잊지 말 것과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말과 글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던 임천택은 1985년 9월 생을 마감했다. 그가 그리운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탄생 100여년이 지난 2004년 딸의 품에 안긴 유해로써 였다.

그러나 오늘 우리와 가장 먼 나라 쿠바에 울린 그의 아리랑은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현재 쿠바에는 한인회가 있고 그의 후손들이 쿠바 정부의 영웅으로 그리고 대학 교수 등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그의 증손녀는 현재 한국에 유학을 와 있을 정도로 그가 남긴 쿠바와의 끈은 이어지고 있다.

임형진(삼균주의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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