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자선냄비의 사회사
[삶과 종교] 자선냄비의 사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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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불어대는 12월의 거리에 어김없이 빨간색의 자선냄비가 등장하였다. 딸랑거리는 은은한 종소리는 마치 세모의 전령이 되어 한 해를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과 사회의 한 구석에서 어쩔 수 없이 웅크린 이웃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듯하다.

자선냄비는 이웃을 위한 선한 목적을 가지고 1891년 1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항구에서 시작되었다. 허리케인으로 인해 이민선 한 척이 파선되어 난민이 생겼지만 그 당시 미국은 지나친 철도확장과 투자로 인한 경제공황이 일어나기 직전이어서 그들을 구제할 경제적인 여력이 없었다. 그럴 때 갑작스럽게 생긴 난민들과 파업과 파산으로 생겨난 실업자 빈민들을 안타까이 여기던 구세군 사관 조셉 맥피(Joseph McFee)는 1천명을 위한 크리스마스 만찬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이전 선원 시절에 영국의 리버풀 항구에서 눈여겨보았던 구제방법대로 오클랜드 항구에 ‘심슨 포트’(Simpson’s pot)라는 선박에서 사용하는 큰 냄비를 내 건 후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이 냄비를 채우십시오!”라고 외치기 시작하여 모금하여 그 계획을 이룰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구세군의 창립자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는 전 세계의 구세군이 12월의 자선냄비를 통해 불우한 이웃을 구호하는 사회봉사를 할 수 있도록 지시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선냄비도 비슷한 환경에서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일찍이 없었던 경제적 호황을 누리며 세계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던 미국은 1929년 후반이 되면서 공업, 농업 등 전반적인 부분에서 과잉생산과 공급으로 인한 재고의 적재로 치솟던 주가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미국은 다시 한 번 경제공황에 늪에 빠졌고 세계 경제를 대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세계의 정세 속에서 식민 지배를 받던 우리나라 조선의 상황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수출시장이 줄어들면서 불황에 휩싸인 일제는 식민지 수탈을 통해서 그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1920년대 일본의 자본이 조선에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도록 ‘회사령’과 ‘관세’를 철폐하여 취약한 조선의 공업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또한 1927년의 발표한 ‘신은행령’으로 조선인 소유의 은행을 강제로 합병 예속하면서 산업 전반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였다.

이와 더불어 1918년 일본에서 일어났던 ‘쌀 폭동’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펼친 산미증산 계획은 농민들을 수탈하여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도시로 이주하여 도시 노동자가 되었지만, 산업 전반의 침체로 인해 곤궁한 삶을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통계에 의하면 1926년 총인구의 11%인 215만명이었던 조선의 세궁민(細窮民)이, 1931년에는 25%인 520만명으로 급증하였고, 걸인의 수도 1만명에서 16만명으로 급증하면서 겨울철 동사자가 속출하였다고 한다. 거기다가 1928년 가뭄과 흉년, 그리고 뒤늦게 쏟아부었던 폭우로 인한 홍수 피해는 조선의 상황을 최악으로 이끌었다.

1928년 12월15일에 시작된 우리나라의 최초의 자선냄비는 이와 같은 열악한 식민지 사회의 환경에 응답한 결단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자선냄비는 한국 전쟁과 IMF를 겪으면서도 99년간 봉사의 종소리를 꾸준히 울리며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을 섬기고 있다.

그런데 올 들어 부쩍 모방한 ‘짝퉁’ 유사 자선냄비들이 등장하여 사회를 혼란스럽게 해 근심이다. 동기가 선하여 목적대로 그 선함을 이루어간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만,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 펼치기를 원하는 자선냄비의 고유한 섬김의 사역과 봉사의 마음이 상실될 것 같아 염려스러울 뿐이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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