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22. 미륵의 고장 안성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22. 미륵의 고장 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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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에 멍든 민초들 미륵 세우고 ‘새시대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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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매산리석불입상(매산리 미륵), 현재 매산리석불입상(매산리 미륵)
안성은 전국적으로 미륵이 많기로 유명하여 미륵의 고장이라고도 불린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16구 이다. 삼죽면 기솔리 석불입상, 죽산면의 매산리 석불입상처럼 거대불인 경우도 있고, 대덕면 대농리 석불입상,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처럼 작은 불상도 있다. 

안성 시내의 아양동 석불입상처럼 시내에 있어 마을 주민들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도 있으며, 서운면 동촌리에는 포도 과수원 비닐하우스 안에 위치하여 잘알려지지 않은 곳도 있다. 안성 미륵은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이 조각한 것이 아닌 평범한 형태의 불상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투박한 솜씨에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단순화시켜 얼굴모습도 아주 친근해 보인다.

미륵은 안성에서도 죽산지역에 많이 몰려 있는데 죽산은 봉업사지를 비롯하여, 장명사지, 장광사지, 미륵당, 칠장사 등 많은 고찰이 위치하여 제2의 경주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많은 사찰이 있었다. 많은 불교문화재가 있는 만큼 또 미륵도 많이 산재해 있다.

경기도에서 가장 큰 미륵은 죽산 미륵당의 매산리 석불입상(경기도유형문화재 제37호)과 일명 쌍미륵이라고도 불리는 기솔리 석불입상이다. 매산리 석불입상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태평원이 있던 곳에 있어 태평미륵이라고도 한다. 태평미륵이 세워진 죽산면은 몽고군과의 전쟁에서 송문주장군이 승리를 하였던 곳이다. 지역에서는 송문주장군의 우국충정을 추모하고 명복을 빌며, 태평성대를 기원하기 위해 태평미륵을 건립하였다는 말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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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양동석불입상(아양미륵, 할아버지 할머니 미륵)
송문주 장군은 1235년 몽고의 고려 3차 침입 때 죽주방호별감으로 있으며 몽고군을 물리쳤다. 송장군은 죽주의 주민들과 죽주산성에서 15일간 전투를 하여 승리를 이끌었는데, 이에 대하여 고려사절요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몽고군사가 죽주에 이르러 항복하라고 타이르므로 성안의 군사가 출격하여 ?아 보냈더니, 다시 와서 포를 가지고 성의 사면을 공격하여 성문이 포에 맞아 무너졌다. 성안에서도 포로써 그들을 역공격하니 몽고군사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또 인유(人油), 소나무 홰, 쑥풀 등으로 불을 놓아 공격하므로 성안의 군사가 일시에 문을 열고 출전하니, 몽고군사 가운데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몽고군사가 온갖 방법으로 공격하였지만 무릇 15일 동안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공격에 사용하던 병기들을 불살라 버린 뒤 물러갔다.”

이렇듯 용맹하고 신출귀몰한 전술로 몽고군을 격퇴하자 성안의 백성들은 송문주 장군을 ‘신명(神明)’이라고 우러러보았다. 몽고군을 물리친 공으로 나라에서는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에 임명하였고, 후에 장군이 세상을 뜨자 죽주민들은 성안에 사당을 세워 지금까지 제를 올리며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이렇게 작게는 죽산 주민을 위하여 크게는 우리나라를 위하여 큰 공을 세운 장군을 위하여 미륵을 세우고 추모하고 있다. 죽산지역의 영웅을 위하여 사당을 세워 제를 올리며 추모하는 것도 모자라 미륵을 세우고 추모할 정도로 주민들과 가까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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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석조여래입상(양성미륵), 대농리석불입상(대농리미륵)

삼죽면 국사암에는 기솔리 국사암 삼존불이 있는데 이를 궁예미륵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아래에 있는 쌍미륵도 궁예미륵이라고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는 통일신라 말기 신라 47대 헌안왕(또는 헌강왕)의 서자로, 외가에서 5월 5일에 태어났다. 이때 지붕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빛이 나와 위로 하늘에 닿았는데, 천문관이 ‘오’자가 거듭된 중오(重五)일에 태어나 나라에 불길하다고 해석하였으므로 왕이 죽이라고 하였다. 아기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누각 밑으로 던질 때 유모가 몰래 받다가 손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어지게 되었다. 이후 다른 곳으로 도망가서 살던 유모에게 자신이 왕족이란 사실을 듣고 세달사로 들어가 무술을 연마하고 불교 교리를 익힌다.

성년이 된 891년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궁예는 제일 먼저 죽주의 초적 기훤에게 찾아갔다. 이 말은 당시 죽산이 안성 근처의 중부지역에서는 가장 큰 세력이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기훤이 궁예에게 좋은 대접을 해 주지 않자 이듬해 기훤의 부하인 원회?신훤 등과 결탁하여 원주의 양길에게 갔다. 그 이후 전투에서 승승장구하여 결국 태봉국을 건국하고 왕이 되었다.

이때부터 궁예는 스스로 미륵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며 미륵신앙을 정치이념으로 삼아 태평성대의 이상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궁예가 죽산에 머문 기간은 비록 1년 남짓이었지만 미륵부처의 출현을 바랐던 안성 사람들에게 남긴 인상은 매우 컸을 것이다. 이에 마을에서는 불상을 세우고 궁예미륵으로 모시고 있다. 신라말기부터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고, 지방 호족들의 쟁투가 일어나면서 일반 민중들은 사회적 혼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때 민중들은 어려운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부처의 출현을 기대하였다.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한 안성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더 큰 혼란을 경험하였고 이에 따라 미륵부처에 대한 갈망은 더욱 강해졌기에 곳곳에 미륵을 세우고 새로운 시대가 오기를 염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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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죽기솔리 국사암 석조여래입상(궁예미륵)

서운면 동촌리 미륵은 포도밭 비닐하우스 안에 위치하여 접근이 쉽지가 않다. 키는 약 2m가량의 훤칠한 높이인데 밭 가운데에 2구의 미륵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작년 봄 몹시 가뭄이 심할 때의 답사갔을 때 마을 주민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 미륵은 키가 꽤 커서 쉽게 올라갈 수가 없다. 마을아이들이 이 미륵에 올라가서 놀면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 같은 가뭄에 왜 아이들이 미륵에 올라가서 놀면 비가 올텐데 올라가지 않냐고 묻자 요즘 시골에는 그곳에 올라가서 놀만한 아이들이 없다고 답하였다. 시골마을의 인구감소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쨌든 마을의 미륵은 엄숙한 신앙의 대상으로서 뿐 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놀이터로 친숙하게 우리들에게 다가와 있다.

홍원의 안성시 학예연구사

■미륵이란?
석가모니의 뒤를 이어 56억 7천만년 후에 세상에 출현하여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이다. 도솔천의 내원궁에 보살로 있다가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고 중생들을 구제 할 것이라고 석가모니불이 예언하였다. 미륵불상이 봉안된 불전을 용화전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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