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경기도의 3·1만세운동과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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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31만세운동 100주년인 동시에 상해임시정부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한 것에 반발한 조선 백성들은 전국적인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며 경기도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시작한 31만세운동은 경기도 지역으로 확산되어 그해 5월 말까지 경기도내 25개 지역에서 시위가 이어졌다. 이때 집회 횟수는 303회, 참가인원은 6만 8천100명에 이르렀다. 격렬했던 시위의 양상만큼 일제의 탄압도 잔혹해서 사망자가 1천469명, 부상자 2천677명, 당시 체포됐던 인원은 4천22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경기도의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3일 개성, 7일 시흥, 10일 양평, 11일 안성, 14일 양주, 22일 김포, 23일 고양 수원, 24일 부천 장단, 31일 이천, 4월 1일 여주 등 도내 22개 시군이 참여해 4월23일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제암리교회 사건‘은 당시에 일어난 일본의 만행과 민족 수난의 대표적 사건으로, 4월15일 일본군은 시위에 적극적이었던 제암리에 출동해 주민들을 교회에 모이게 한 후 석유를 뿌려 불을 지르고 교회에 총을 난사해 주민들을 집단 학살했다.

이런 일제의 만행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의 백성들은 다양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으며, 많은 경기도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들 일제의 폭정에 항거하였다.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안재형, 여운형, 조소앙, 엄항섭 선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평택 출신의 민세(民世) 안재형은 일본유학파로 상해로 망명하여,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와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부(聯統府) 역할을 수행하다 일본경찰에 붙잡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양평 출신의 몽양(夢陽) 여운형은 상해임시정부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으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44년 8월 독립운동과 국가 건설을 위하여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파주 출신의 용은(鏞殷) 조소앙은 일본 유학 후 교편생활을 하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 겸 외무부장을 역임했다. 임시정부의 내분을 수습하려고 김구(金九)·안창호(安昌浩)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결성하였으며 1948년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김구 등과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

여주 출신의 일파(一波) 엄항섭은 일찍이 보성법률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몸담게 된다. 임시정부가 분열되고 와해의 위기가 올 때마다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을 모으고 정당운동과 광복군 설립의 실무를 담당했으며 김구 선생이 가장 믿고 함께한 동지였다.

경기도에서는 이처럼 불길 같은 만세운동과, 헌신적인 독립운동가들이 앞장서서 국권회복과 독립에 이바지하였다. 단재 신채호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였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준비하는 통찰력을 갖기 위해서다. 36년이란 짧지 않은 일제 식민지 시대를 극복하고 성공적인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선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선열들의 뜻을 이어받아 경기도와 경기도민이 남북 평화체제 구축과 통일에 기여하여 그분들이 이루지 못한 유업을 완성해야 할 것이다.

한덕택 남산골 한옥마을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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