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16. 위대한 평민 목사 이필주(李弼柱)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16. 위대한 평민 목사 이필주(李弼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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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교사·목사 파란만장한 삶… 독립투쟁 여정

“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고 고생이 너무나 심하여 나는 때때로 죽고 싶은 생각이 많이 나서 산중이나 물가에 가서 홀로 운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곤란하게 사는 중에도 주색잡기에 침혹하여 방탕한 생활을 은근히 계속하니 나는 점점 버린 사람이 되었다. 소고 장고 두드리며 노래하고 춤추기와 탁견하고 편싸움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살림에는 힘을 쓰지 아니하니 식구의 생활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어렵게 되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이필주가 고백한 자신의 청년시절이다.

택견꾼, 밥벌이를 위해 군인이 되다
18세에 부친을 잃고 가장 노릇을 하던 이필주는 21세 되던 1890년에 친구의 권유로 구한국 군대에 병사로 입대했다. 밥벌이를 위한 것이지만 몸을 쓰는 군대일이 적성에 맞았다. 많지는 않지만 매달 급여를 받게 되면서 생활도 안정되었다. 1894년 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의 일원으로 농민군 진압에 참전했다. 이 와중에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이필주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 교관에게 신식 훈련을 받았다. 농민군이 가을에 다시 봉기하자 또 출전하게 된 이필주는 참교(분대장급)로 진급하고 훈련대로 자리를 옮겼다. 훈련대에서 복무하던 그는 신설된 시위대로 전입하여 부교로 승진했다. 이 무렵 일본 낭인들이 명성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1896년에는 일본의 감시를 받던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으로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관파천 후에는 러시아 군사교관에게 군사훈련을 받았다.

1897년, 이필주는 김인숙과 결혼하여 가정을 갖게 되었다. 남매를 낳아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기쁨도 잠시, 1902년 전염병으로 사랑하던 남매를 모두 잃었다.
 

인천 내리교회에 설립된 영화학교 학생들의 군사훈련.
인천 내리교회에 설립된 영화학교 학생들의 군사훈련.

전덕기를 만나 숨겨진 재능을 꽃 피우다-교육운동
인생의 허무를 느끼며 괴로워하던 이필주는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었다. 상동교회에서 의료선교사 스크랜턴과 숯장수 출신의 전도사 전덕기와의 만남은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1903년 봄에 세례를 받고 상동교회의 정식 교인이 된 이필주는 그해 가을에 군복을 벗어던졌다. 생계를 위해 막노동을 하던 그에게 교회가 청소를 맡겼다. 교회청소를 하면서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사경회도 빠지지 않고 출석하며 신앙생활에 충실했다.

1904년 4월 이필주는 전덕기의 추천으로 공옥소학교의 체육교사에 임명되었다. 이필주가 택견을 잘하고, 일본과 러시아의 신식 군사훈련을 받은 군인출신이기 때문이다. 10월부터는 상동청년학원의 체육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청년학원의 교장은 전덕기, 학감은 이회영, 교사는 주시경, 장도빈, 최남선, 조성환, 남궁억 등 당대 최고의 실력자들이었다. 이필주가 지도하는 체육시간은 매우 인기가 있었다. 상동교회 뒤뜰에서 도수체조를 가르치고 축구와 농구, 야구도 가르쳤다. 때때로 학생들에게 군복같은 정복을 입히고 나무로 만든 총을 메고 북을 치고 보조를 맞추어 거리를 행진하며 노래를 불렀다.

“무쇠 골격 돌근육 소년 남자야/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나라에/소년의 활동시대 다다랐네/만인 대적 연습하여/후일 전공 세우세/절세 영웅 대사업이 우리 목적 아닌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나라의 운명이 기울자 애국지사들 상동교회로 몰려들었다. 지사들은 공을 차고 씨름을 하며 학생들과 어울렸다. 군인출신의 과격파 독립지사 이갑과 도산 안창호가 상동교회 뜰에서 씨름을 벌이기도 했다. 1907년 일제는 헤이그밀사 사건의 책임을 지우고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도 해산했다. 상동교회 담임목사로 정식 부임한 전덕기가 시국강연회를 열었다. 진사 최성모는 전덕기의 강연에 감동을 받아 그날로 자신의 상투를 자르고 배제학당에 다니던 아들과 교회에 등록했다. 서울에서 학동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던 상주 출신의 김진호도 교회에 등록했다. ‘상동교회 삼총사’로 불리던 이필주, 최성모, 김진호 세 사람은 전덕기를 도우며 민족운동에 헌신했다.
 

남양교회 마당에 이필주를 기리는 비석.
남양교회 마당에 이필주를 기리는 비석.

삼일운동의 중심이 되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비밀결사 신민회가 결성되었다. 이동휘, 이갑 등의 과격파와 전덕기와 안창호를 중심한 온건파가 노선을 놓고 갈등했으나 교육을 통한 국력배양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러한 지도노선에 따라 안창호가 평양에 대성학교, 이승훈이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상동교회는 공옥소학교와 청년학원을 통해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다. 신민회의 산하단체로 탄생한 학우회는 학생들의 인격을 수양하고 단체생활의 훈련에 힘썼다. 한 가지 이상의 기술이나 전문 학술을 반드시 학습하여 직업인으로서 자격을 갖추도록 지도하고, 매일 지덕체(智德體)의 자기 수련에 힘쓰도록 가르쳤다.

1910년 일제의 강탈로 조선이 사라졌다.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지 고민하던 이필주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1911년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 과정을 수료했다. 이필주가 목회에 전념하려고 준비하던 1914년 3월, 전덕기 목사가 39세의 한창 나이로 별세했다. 전덕기는 자신보다 여섯 살이나 어렸으나 이필주가 존경하며 따르던 동지이자 스승이었다.

이필주는 1918년 6월 민족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사임한 손정도 목사 후임으로 정동교회 담임목사로 임명되었다. 정동교회에는 배재학당장 신흥우, 기독신보사 서기 박동완 등이 직분을 맡아 활동하고 있었다. 이필주는 이들과 함께 활발한 목회 활동을 전개했다. 그해 말, 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강대국의 지배를 받던 약소국들이 독립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조선독립의 방안을 찾고 있었다. 1919년 2월 25일, 해주에서 최성모 목사가 배재학당을 졸업하는 아들의 졸업식을 보고 상급학교 진학을 상의하기 위해 서울에 와 이필주의 집에 지내게 되었다. 이날 최성모는 박희도에게 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돌아와 이필주에게 만세운동을 준비 소식을 전하며 민족대표로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망설임 없이 찬성한 이필주는 다음 날인 26일에 최성모와 함께 박희도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렸다. 2월 27일 이승훈을 비롯한 기독교 대표들이 그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배포할 지역책임자를 선정하고, 기독교계 민족대표 16명을 확정했다. 2월 28일 밤 이필주는 손병희의 집에서 가진 전체 회합에 참여하고 집에 돌아와 가족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이 3?1독립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게 되었음을 알렸다.

3월 12일 경무총감부에서 검사가 물었다. “금후에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이필주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렇다 어디까지든지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 일제는 취조서에 이필주의 본적을 고양군 한탄면으로 기록하고 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와 경성감옥에서 2년 8개월 동안 독방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4일 만기로 서울 경성감옥에서 최성모, 박동완 등 동지 15명과 함께 석방되었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 열사.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 열사.

의열단 김상옥, 위대한 별
1922년 12월 하순, 목사관으로 한 청년이 찾아왔다. 그 청년은 예전에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체육교사로 일할 때 가르친 제자 김상옥이었다. 이필주 부부는 폭탄을 품고 온 의열단원인 김상옥을 안방에 숨게 하고 대소변도 방에서 보게 하였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은 종로 경찰서에다 폭탄을 던지고 일본 형사대의 포위망을 뚫고 남산으로 피신했다가 경찰대가 다시 은신처를 포위하자 쌍권총을 가지고 세 시간 동안이나 격전을 벌여 경찰 여럿을 사살하고 마지막 한 발 남은 총알로 자결했다. 1923년 벽두에 한성을 뒤흔든 김상옥 의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이필주는 이 사실을 비밀에 붙여두고 목회에 헌신했다. 명절에 부모의 묘소에 성묘를 할 때면 김상옥의 장남을 데리고 가서 의사의 무덤에 참배하고 명복을 빌었다.

서울 여러 곳에서 목회하던 이필주는 1934년 3월 65세로 은퇴한 뒤 수원 지방의 요청을 받아 목회자가 비어있던 남양교회에서 목회를 이어갔다. 수원 남양지역은 3?1운동 당시 가장 치열하게 만세운동이 벌어졌던 곳으로 ‘제암리 학살’을 비롯해 큰 피해를 입었던 지역이다. 이필주는 3?1절을 맞으면 사흘 동안 금식하며 이날을 기념했다.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신앙의 지조를 지키던 그는 1942년 4월 21일, 74세로 운명했다. 장례일, 남양에서 비봉으로 가는 길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946년에 민족대표로 감옥살이를 함께한 의형제 오화영목사가 참석한 가운데 남양교회 마당에 이필주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봄바람 같은 온화한 기운이 얼굴에 가득하여 근심걱정이나 분노가 나타나지 않았다.” 비문에 새겨진 글이다. 3?1운동 50주년을 맞은 1969년에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과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하게 생존한 이갑성 옹이 참여하여 “위대한 별은 여기 빛나고 있다”로 시작되는 기념비를 다시 세웠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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