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6. 충남 예산 수당 이남규의 고택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6. 충남 예산 수당 이남규의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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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로운 호국의 성지… 조선양반 생활사를 엿보다
안채 전경. 중앙 대청 마루로 갈수록 기단을 높이 쌓아, 대청에 앉았을 때 문간채의 지붕이 상대적으로 낮게 보여 시선이 덜 답답하다.
안채 전경. 중앙 대청 마루로 갈수록 기단을 높이 쌓아, 대청에 앉았을 때 문간채의 지붕이 상대적으로 낮게 보여 시선이 덜 답답하다.

현충일 다음날, 비가 내리지만, 예정대로 충남 예산으로 향했다. 한말의 독립운동가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고택, 4대가 내리 훈장을 받고 국립묘지에 묻힌 이채로운 호국의 성지다. 그러나 의외로 충청도 토박이들 사이에서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는 않은 듯, 동행한 이들도 내력을 잘 알지는 못한다. 잘 정비된 진입로에 들어서면서 집과 사람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달라졌다. 이 집을 짓고 경영한 주인공은 숙부인(淑夫人) 전주 이씨다.

북인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손자며, 수당(修堂)의 10대조인 한림공(翰林公) 이구(李久)의 부인이다. (이구가 1637년 지었다는 엉터리 주장이 있지만, 1609년 스물넷에 죽은 이구가 1637년에 집을 지을 수는 없다.) 숙부인의 고조부는 왕실용 도자기를 굽는 사옹원(司饔院) 도제조(都提調)를 역임하는 등 왕자로서는 파격적으로 정무에 참여한 성종(成宗)의 아들 이성군(利城君)이다. 이성군은 그림에도 재주도 있어, 붕어한 임금의 어진(御眞) 즉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도 주관했다 한다.

여성의 힘, 무너지는 집안을 일으켜 세우다
스물에 청상과부가 된 숙부인은 1636년 병자호란 때 피난을 떠났다. 이듬해 난이 끝나자 시댁인 한산 이씨의 세거지인 충남 보령을 떠나 시조부 이산해의 묘소 가까운 예산 갈막마을 산자락에 터를 잡았다. 노복(奴僕)을 불러모아 가시덤불을 베고 집을 짓고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다. 숙부인은 아버지 없는 4살짜리 아들을 가르쳐 진사를 만들고, 진사 아들이 32살에 죽자 하나 남은 5살짜리 손자를 길러 현감으로 세상에 내보냈다. 숙부인은 여든 살이 넘도록 오래 살면서 남편 없는 집안 살림을 주관했다. 남편만 없는 게 아니라 시댁이 주도하던 북인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을 것이다. 그 집을 잘 관리해 중흥시켰으니, 당대 여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보통의 양반가는 행랑채가 사랑채를 보호하고, 안채는 사랑채보다 안쪽에 들여 앉힌다. 이 집은 다르다. 안채가 사랑채보다 더 앞으로 나와 있다. 안채를 보호하는 문간채는 당시로써는 최신 유행이라 할 우진각 지붕이다. 북방 유목민족의 건축 방식에서 유래한다고 하는데, 호란 이후 청나라의 영향이라고 알려졌다. 팔작지붕은 위에서 보면 사다리꼴 4개가 중앙의 긴 직사각형을 둘러싼 모양인데, 우진각지붕은 긴 사다리꼴이 마주 보고 양쪽 빈자리를 삼각형이 채우는 형태다.

평원정 현판. 추사 김정희의 절친인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 1783~1859)이 쓴 원래의 현판은 안타깝게도 6•25 전쟁 전에 도난당했다 한다.
평원정 현판. 추사 김정희의 절친인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 1783~1859)이 쓴 원래의 현판은 안타깝게도 6•25 전쟁 전에 도난당했다 한다.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건축
문간채는 계단을 여섯 개나 밟고 올라갈 정도로 높은 축대 위에 서 있다. 아마 이 높은 축대 위에서 숙부인이 남녀 노복들을 호령했을 것이다. 문간채 대문의 아래위는 휜 나무를 잘 사용한 월방의 형태다. 사람이 주로 드나드는 중앙은 아래턱은 낮고 위턱은 높아 솟을대문이 아니면서도 비슷한 기능을 할 수 있다. 문간채 앞면 화방벽(火防壁)은, 아래는 굵은 냇돌 위로 갈수록 작은 냇돌을 박고 황토로 줄눈을 마감해 안정적이면서도 부드럽다.

시선을 차단하는 문간채 문간을 지나 안채로 들어서면 안채의 축대는 3벌대로 나직하다. 중앙의 대청마루가 정면 3칸으로 매우 널찍한데, 칸마다 바라지 창을 설치해 여름이면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있다. 날개채는 안방과 건넌방이 끝에 부엌을 두 칸 두고 부엌문과 통풍용 살창, 부엌 위 다락 광창까지 모두 대칭으로 꾸몄다. 퇴는 나무판 2쪽 폭으로 매우 좁다.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서쪽 협문은 외부에 완전히 노출돼 있다.

입구에서 본 사랑채 평원정. 나무마다 용두목, 오륜목 식으로 이름이 붙어 있어 이채롭다.
입구에서 본 사랑채 평원정. 나무마다 용두목, 오륜목 식으로 이름이 붙어 있어 이채롭다.

평원정 평안하고 화락하되 끝없이 아득하다
사랑채는 3벌대의 낮은 기단 위에 소박한 자연석 돌계단을 딛고 올라가지만, 정면 여섯 칸, 측면 두 칸으로 당당하다. 좌우에 넉살무늬 4분합문을 단 온돌방을 두고, 대청마루에는 띠살무늬 4분합문을 꾸몄다. 사랑채 뒤에 퇴를 달고 부엌을 꾸민 실용적인 발상, 특이한 구조와 배치, 운영에 400년 전 숙부인 할머니의 자취가 배어 있다. 사랑채 중앙에는, 원래의 평원정(平遠停) 편액은 6·25때 없어지고 김충현 선생이 쓴 편액이, 좌우의 방 입구에는 ‘청좌산거(請坐山居)’ ‘홍엽산거(紅葉山居)’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평원’은 중국 북송 시대의 최고의 화가요 이론가 곽희의 『임천고치(林泉高致)』<산수훈(山水訓)> 에 나오는 말이다. 산 아래에서 산 정상을 바라보는 것은 높은 원경 즉 고원(高遠), 산 앞에서 산 뒤를 들여다봄은 깊은 원경 즉 심원(深遠)이며, 가까운 산에서 먼 산을 바라봄은 수평 원경 즉 평원(平遠)이라 한다. 고원의 기세는 우뚝 솟은 듯하며, 심원은 겹겹이 포개져 있고, 평원은 평안하고 화락하되 아득하고 넓다. 집주인 숙부인이 사랑채를 평원정이라 한 뜻이 조금은 짐작이 된다. 그러나 숙부인 할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만만찮은 고난과 풍파가 집안에 닥쳤다. 이구와 아들, 장손까지 3대가 일찍 세상을 떴고, 북인의 시대가 끝나고 서인이 득세했기 때문이다.

4대에 걸친 호국 정신
궁내부 특진관(차관급)을 지낸 수당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 의병에 참여해 홍주(지금의 홍성) 전투에 장남 이충구와 함께 선봉이 되었다. 이후 부자가 왜병에게 붙잡혀 한 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고 결국 선생과 아들(당시 33세), 가마꾼까지 한날한시에 왜군의 칼날에 스러졌다. 손자 이승복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증손자 이장원 소위는 6·25 당시 원산 전투에서 산화했으니(당시 22세) 여장부 할머니의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았다 하겠다. 수당이 고종에 올린 상소문 일부를 옮겨본다.

멸망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더욱 멸망을 재촉하니 그 존립이 구차한 것이요,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음을 재촉하니 그 삶이 구차한 것이다.
 

수당 고택의 가장 큰 자랑이자 특징을 보여주는 문간채의 위용. 안채를 보호하는 문간채가 사랑채보다 더 앞에 더 화려하게 더 높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 아래는 정성들여 모은 수석이 가지런히 놓인 안채 날개채. 낮은 머름 위에 얹힌 4분합문이 깔끔하다.
수당 고택의 가장 큰 자랑이자 특징을 보여주는 문간채의 위용. 안채를 보호하는 문간채가 사랑채보다 더 앞에 더 화려하게 더 높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 아래는 정성들여 모은 수석이 가지런히 놓인 안채 날개채. 낮은 머름 위에 얹힌 4분합문이 깔끔하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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