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7.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7.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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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누명 벗고… ‘충신 가문’ 명성 드높이다
오정방 고택 전경-양반집 사랑채로서는 이례적으로 누마루가 옆의 마루방과 바닥높이가 같다. 집주인의 근신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 같다.
오정방 고택 전경-양반집 사랑채로서는 이례적으로 누마루가 옆의 마루방과 바닥높이가 같다. 집주인의 근신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 같다.

안성 덕봉리는 주민의 90% 이상이 해주 오씨인 철저한 집성촌이다. 충정공 오두인을 모신 덕봉서원이 있고, 선조의 묘역과 종택이 잘 보존돼 있으며, 잘 지은 문중 재사까지 들어선 특이한 곳이다. 넉넉한 고문헌을 바탕으로 마을지까지 일찌감치 발간한 ‘범절’ 있는 동네다. 진산인 고성산이 크게 높지는 않지만, 뒤를 받치고, 좌청룡 바리봉, 우백호 배미큰봉이 양옆을 포근히 감싸며 멀리 앞으로 대덕산이 보인다. 풍수를 잘 모르는 필자로서는 괜찮은 자리라 느껴지는데, 말 거들기 좋아하는 지관들이나 풍수들이 별로 언급하지 않은 점은 이상하기만 하다. 왜 풍수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가 하면, 남들이 안 하니 나라도 하자는 생각도 있고, 이 가문만큼 낮은 데서 크게 치솟아 올라온 가문도 별로 없으니 풍수의 덕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변화는 가문이 덕봉리에 자리 잡은 시점에 시작되었다.

멸문지화의 위기에 선 해주 오씨
해주오씨가 덕봉리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불명확하나 1525년(중종 20) 유세창, 유세영 무리의 고변 무고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이들은 반란을 계획했다가 사실이 밝혀지면 벌을 받을까 두려워, 오히려 거짓으로 역모를 날조해 고변했다. 60여 명이 연루돼, 국문 과정에서 7명이 죽고 16명은 대역죄로 능지처참 됐다. 오필경 부자도 처형당하고 형 오현경과 조카 오경운 부자는 장형을 받고 경남 산음과 안음으로 유배됐다가 세상을 떠났다.

오경운의 부인 풍산 심씨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시신을 수습해 친정 근처에 장사지내고, 시묘하는 한편 두 아들을 키웠다. 당시 워낙 세도가였던 풍산 심씨네는 지관을 천시했는데, 심씨 부인은 지관들을 잘 대해주었고 그래서 명당에 시아버지와 남편을 모실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쨌든 심씨 부인은 친정의 도움으로 할아버지, 아버지 없는 10살, 7살의 수천, 수억 형제를 신중하게 말하고 행동하도록 엄하게 잘 가르쳤다.

여성의 힘, 역적의 후손에서 명문가로
시간이 흘러 유세창의 역모고변은 거짓으로 판명되고 오현경 부자도 억울한 누명을 벗고 관직도 회복되었다. 아들 수천, 수억 형제도 출사해 무관으로 인정받았다. 수억의 아들 정방(吳定邦)이 무과에 장원급제한 것이 결정적 변곡점이었다. 장원급제한 정방을 병조판서인 율곡 이이(李珥)가 인견(引見)하고 영재를 얻었다고 칭찬했을 정도였다. 정방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또 임금의 호종대장으로 현달(顯達)해 가문의 명성을 떨쳤다.

심씨 부인의 부덕(婦德)과 효열(孝烈)이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위기에서 가문을 일으키고 명문가로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후손들은 2015년 영모각(永慕閣)을 건립해 심씨 부인의 위대함을 기리고 있다. 이때부터 안성 덕봉리의 주인은 풍산 심씨에서 해주 오씨로 바뀐다. 마치 경주 양동이 손씨에서 여주 이씨 세거지로 바뀌듯.

해주 오씨는 원래는 중국이 원래 고향이지만 고려 때 건너와 해주에 오래 살았고, 조선조부터는 덕봉리 정착 전까지 용인 기흥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중후기에 오씨 가문은 문무 대과 특히 무과 급제자를 대거 배출해(문과 18명, 무과 107명) 명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예산 수당 고택에서도 전주 이씨 부인의 리더십이 위기의 가문을 일으켰는데, 정무공 고택도 절대 덜하지 않다. 국난사양상 가난사현처(國難思良相 家難思賢妻).

사랑채 퇴전당 측면-그 흔한 누마루도 없고, 홑처마 지붕이다. 퇴전당 측면 툇마루에는 난간을 두르고 亞자 무늬를 넣었다. 기둥은 모두 8각 기둥이다. 원주 즉 둥근 기둥은 궁궐이나 사찰에서 쓰였고 반가에서는 4각 기둥을 썼는데, 근신 또 근신하던 당주들에게 계자도 없는 亞자 무늬 난간과 8각 기둥이 그나마의 멋이요 호사였을 것 같다. 검소하다 못해 너무 눈치 보는 것 아닌가 싶어 안쓰럽기 조차 하다.
사랑채 퇴전당 측면-그 흔한 누마루도 없고, 홑처마 지붕이다. 퇴전당 측면 툇마루에는 난간을 두르고 亞자 무늬를 넣었다. 기둥은 모두 8각 기둥이다. 원주 즉 둥근 기둥은 궁궐이나 사찰에서 쓰였고 반가에서는 4각 기둥을 썼는데, 근신 또 근신하던 당주들에게 계자도 없는 亞자 무늬 난간과 8각 기둥이 그나마의 멋이요 호사였을 것 같다. 검소하다 못해 너무 눈치 보는 것 아닌가 싶어 안쓰럽기 조차 하다.

퇴전당, 온전하게 물러나다
정무공파 종택은 1515년 경 처음 건립된 이래 정무공 오정방, 경상도 관찰사 오숙 4형제와 영의정 오두인 등 영현(명사)을 여럿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원래 100여 칸 건물이었다 하니 별도의 행랑채 문간채 등이 외부와 경계를 형성했을 것이다. 현재는 문간채 안채 겸 사랑채 그리고 사당으로 구성돼, 영의정에 판서를 여럿 배출한 명문의 종가로서는 규모가 작다.

사랑채 누마루는 바닥높이가 옆방과 같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한편, 큰 시련을 겪은 집주인의 근신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정무공은 당대에 두 번이나, 피난길에 오른 임금의 호송대장으로 활약했다. 짧은 기간에 명예만 회복한 것이 아니라 왕실의 신임까지 회복했으니 얼마나 피눈물나는 노력을 했을까? 가문의 아픔과 인고의 세월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사랑채는 건축주 정무공의 아호인 퇴전당을 당호로 썼다. 퇴전당(退全), 온전하게 물러나라, 증조부 형제가 누명을 쓰고 비명에 세상을 뜬 이 집안에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또 무관에게는 세 불리하면 전력을 오롯이 간직해 후일을 기약하는 퇴전이 임전무퇴만큼이나 중요할 것이다. 덩케르크에서 눈물을 머금고 후퇴했다가 노르망디에 상륙한 2차 대전 당시 영국군처럼.

정무공 종택, 개혁적 실용적 배치
선비나 문반의 고택 가운데는 논산 명재고택이나 안동의 의성김씨 내압 종택 정도가 개혁적인 시도가 눈에 뜨이는 사례다. 그 외에는 문반보다 무반의 집이 구조나 배치, 세밀한 인테리어 등 기능적으로 더 우수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집도 그렇다. 사랑채 건넌방 앞의 툇마루를 이용하여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해 단일채로 구성한 독특한 구조다. ㄱ자형 몸채에서 ㅡ자형 부분을 길게 연장하고 중간에 사잇담을 두어 안채 영역을 감싸고 안팎을 나누는 수법은 창덕궁 연경당과 비견된다.

안채와 사랑채 문을 두어 공간의 다양성을 살리고 남녀 공간을 ‘적당하게’ 구분한다. 안채와 사랑채를 ‘엄격하게’ 구분하던 17세기 사대부 가옥의 일반 경향과 다르다. 또 사랑채 전면의 팔각기둥과, 채광 및 통풍을 원활히 하려고 부엌 앞뒤에 달아둔 개폐 가능한 주마창이 특징이다. 치목(재목을 다듬고 손질함), 건물 배치와 구성이 빼어나고, 조선 중기 양반가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이왕 나선 김에 집안의 많은 묘소, 웅장한 문중 재사, 덕봉서원, 백련정, 김좌진 장군의 부인 생가 등도 둘러보시라 권한다.

퇴전당(退全堂) 편액-우암 송시열의 글씨. 오른쪽 구석에 작은 글씨로 ‘우암 선생 필적(尤庵先生筆跡)’이라고 적혀 있다.
퇴전당(退全堂) 편액-우암 송시열의 글씨. 오른쪽 구석에 작은 글씨로 ‘우암 선생 필적(尤庵先生筆跡)’이라고 적혀 있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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