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2. 양주 매곡리 백수현 고택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2. 양주 매곡리 백수현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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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격조 묻어나는… 명성황후가 비상시 준비한 피난처
사랑채처럼 보이지만 행랑채다. 행랑채가 이 정도면 사랑채가 원래대로 남아 있었다면 얼마나 대단했을까.
사랑채처럼 보이지만 행랑채다. 행랑채가 이 정도면 사랑채가 원래대로 남아 있었다면 얼마나 대단했을까.

경기(京畿)란 서울 근처의 땅을 말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왕경 오백 리 이내의 땅을 기(畿)라 했다고 한다. 우리처럼 작은 나라에서 오백 리면 거의 대전까지니 비현실적이다. 그냥 서울 근교 이백리 정도로 잡으면 얼추 현재의 행정구역상 경기도 그리고 현대인의 지리적 감각과 비슷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출세한 이들은 중앙에서 활동하다가 서울 근교, 즉 기내(畿內)에 집을 마련해 은퇴하는 경우가 많다. 농경 사회였던 조선조에는 그런 경우가 훨씬 많아 한양 근처에 집과 농장을 마련해 정착한 다음 일가붙이를 불러들여 집성촌을 이루곤 했다.

수원 백씨 집성촌… 풍수학적 길지
전란이나 정변을 피해 이주하기도 하고, 정반대로 사패지(賜牌地) 즉 왕실의 총애를 입어 땅이나 임야를 하사받고 그 자리에 정착하기도 했다. 남양주 마재 마을이 다산 정약용을 필두로 한 나주 정씨에게 정변을 피해 들어간 곳이었다면, 수원 백씨에게 양주 매곡(梅谷) 마을은 왕실의 은총을 받아 자랑스레 입성한 예에 가까운 곳이다. 350년 전 조선 중기 문신인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이후 아직도 수원 백씨 8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이장의 설명으로는 일대 농지와 임야를 합해 백만 평 이상이 수원 백씨 소유라 한다.

매곡마을 혹은 맹골마을은 이름 그대로 마을 가운데 우뚝한 매화나무가 동네 이름이 되었다. 백수현 고택은 마을 뒤 매봉산을 진산으로, 매곡리의 가장 경개 좋은 반듯한 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매봉산은 이 지역에서는 우뚝하지만 어지간한 지도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낮은 산이라(300m나 될까?) 평지처럼 보이는 편안한 경사다. 마을 진입로와 나란히 이름없는 작은 개울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고, 멀리 입암천은 매곡리 전체를 반대 방향으로 크게 휘감고 흐른다. 마을 앞 샘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한겨울에도 온기가 있어 아낙네들이 그 물로 겨울철에도 빨래를 쉬지 않았다 한다. 산은 낮아 큰 바람이 없을 것이며 물이 포근히 감아 들어오니, 장풍 득수에 배산임수를 모두 갖춘 풍수학적인 길지겠다.

이 집의 가장 큰 특징을 이루는 부엌의 벽. 고미혀를 받친 고미반자로 부엌위에 다락을 두고, 시렁을 달아냈다. 시렁 양쪽을 받치는 까치발을 자세히 보면 당초문양을 세련되게 고부조해 명성황후를 모셨다는 설의 근거가 된다.
이 집의 가장 큰 특징을 이루는 부엌의 벽. 고미혀를 받친 고미반자로 부엌위에 다락을 두고, 시렁을 달아냈다. 시렁 양쪽을 받치는 까치발을 자세히 보면 당초문양을 세련되게 고부조해 명성황후를 모셨다는 설의 근거가 된다.

4백 문장, 위기를 극복하다…격조 높은 사대부 제택의 전범
수원 백씨 입향조 백인걸은 형제와 사촌까지 4백 문장(四白文章)이라 했다는데, 인영(仁英), 인웅(仁雄), 인호(仁豪), 인걸(仁傑) 네 사람 이름을 모으면 영웅호걸이다. 인영은 도승지, 인걸은 대사간에 올랐고 청백리에까지 선정됐다. 가문이 한창 뻗어나갈 즈음, 백씨 가문에게 위기가 닥쳐왔다. 기축옥사, 조작된 모반사건에 백인호의 손자 수민(白壽民)이 연루된 것이다. 정여립의 형 여흥(鄭汝興)의 사위였던 수민의 4형제와 대사성을 지낸 아버지 백유양이 모두 장살 당했다. 결과 위기를 잘 넘긴 백인걸의 후손이 수원 백씨 과반수를 차지하게 됐다.

백수현 고택은 전하는 바로는 고종 왕비인 명성황후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피난할 집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안채 하나만 남아 있다. 명성황후 피신설이 그럴싸한 것은, 우선 집이 사대부 제택(第宅) 중에도 격조 높게 정성들여 잘 지어졌기 때문이다. 말끔하게 다듬은 화강암의 안채 두 벌대 설치, 사다리꼴로 다듬은 주초, 고급스러운 문살과 문고리 치장이 그렇다. 다음으로, 이곳은 한양에서 보면 명성황후의 고향 여주와 정반대 방향이다. 당시 기준으로는 서울에서 꽤 떨어져 있지만, 또 마음먹으면 멀지만도 않다. 특히 서울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다. (오늘날에도 곳곳에 군부대가 진치고 있다.)

형의 안채와 형의 행랑채, 마당을 가운데 두고 튼 형의 집이다. 안채는 대청과 건넌방을 남향으로, 안방과 부엌이 동향한 서변(西邊)이다. 대청은 툇마루가 있는 칸반통의 2칸인데, 문얼굴을 놓고 사분합을 달았다. 뒷벽에 머름을 드린 문얼굴에 바라지창(廣窓) 사이 뒷산이 보인다. 대청 동편의 건넌방은 칸 반 크기다. 안방과 부엌은 각 칸 반 통의 2칸짜리로 시골서는 드물게 널찍하다.

부엌의 크기와 다락ㆍ벽면 구성 등이 집의 특색이니, 부엌 서쪽에 2칸 달아 1칸을 찬방으로 꾸몄다. 부엌 위로 고미혀를 받친 다락을 두고, 작은 분합의 광창을 내고 안마당쪽에 선반을 멍에에 맸다. 선반 아래 부엌벽은 판벽에 널문짝을 달았다. 나머지 칸은 머름을 드리고 붙박이 살대를 박아 광창을 넣었다. 행랑채는 남면 7칸 꺾어서 동변 7칸, 합이 14칸인데, 남면 1칸이 중문으로 열려 있다. 중문 서쪽 방들은 사랑방처럼 만들었으나 단칸통이고, 부엌 1칸이 달려 있다. 중문 동쪽에 마굿간과 마부 방을 두고, 꺾은 자리에 부엌 2칸, 뜰아랫방 2칸, 곳간과 2칸 내고(內庫)를 차례로 들였다.

망와. 강희21년이라 쓰여 있어 17세기에 건축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기와의 마모도로 볼 때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도 만만찮다.
망와. 강희21년이라 쓰여 있어 17세기에 건축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기와의 마모도로 볼 때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도 만만찮다.

진한 매실차로 매화마을을 느끼다
안채ㆍ행랑채 밖에 사랑채 터가 남아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매봉산에서 내려와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까지 터가 이어졌다 한다. 사랑채와 별당채가 남아 있다면 정말 명품이었을 것이다. 집 앞에 다듬다 만 주초들이 뒹군다. 꽤 오래 사람이 출입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고 어설퍼 보인다. 고택은 현대 생활에 불편하기 때문에 거주자 없이 관리할 수밖에 없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죽은 집일 수밖에 없다.

수원 백씨는 다재다능하다. 조선조 문과 급제자가 백인걸의 증조부 이래 64명에, 무과 급제도 백인현 등 101명이다. 요즘 드라마화된 마의(馬醫) 출신 어의(御醫) 백광현도 넓게 보면 수원 백씨의 작은 집 임천 백씨 출신이다. 현대에도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백병원 설립자 백인제,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한 명인 백용성 스님, 6·25의 명장 백선엽, 백인엽 등 다양한 인물을 배출했다. 백수현 고택을 둘러보다가 싫증 나면, 동네카페에서 진한 매실차 한 잔을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행랑채의 꽃담. 아래는 자연석으로 위는 기와로 꽃담을 만들었는데, 자연석도 아래는 큰돌 위로 올라갈수록 크기를 줄여 균형감과 안정감을 준다. 옆에는 기와로 쌓은 굴뚝. 굴뚝의 높이와 기와로 이은 품새가 궁궐 건축의 수법이다.
행랑채의 꽃담. 아래는 자연석으로 위는 기와로 꽃담을 만들었는데, 자연석도 아래는 큰돌 위로 올라갈수록 크기를 줄여 균형감과 안정감을 준다. 옆에는 기와로 쌓은 굴뚝. 굴뚝의 높이와 기와로 이은 품새가 궁궐 건축의 수법이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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