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7. 슬픈 조국의 노래… 독립투사 조문기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7. 슬픈 조국의 노래… 독립투사 조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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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대한민국 기쁨도 잠시… 친일파 득세보며 ‘통탄’
화성 매송초등학교 내 조문기 선생의 동상.
화성 매송초등학교 내 조문기 선생의 동상.

“그날이 되면 나는 산으로 바다로 경축의 냄새가 안 나는 곳으로, 펄럭이는 태극기가 안 보이는 곳으로, 경축 현수막이 안 보이는 곳을 찾아 피신을 간다. …8ㆍ15 이후 숙청된 것은 친일파들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운동 세력이었다. 친일파들은 새로운 권력자 미국을 등에 업고 재빠르게 반공세력으로 변신해 독립운동세력을 무력화시켜놓고 이 나라의 주류로 등장했다. …그래서 나 혼자라도 광복절 경축식은 국민기만이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조문기 선생 회고록 <슬픈 조국의 노래> 머리말 중-

일제 말 한국 청년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음을 증명해 보였던 독립투사 조문기는 1926년 화성군 매송면 야목리에서 태어났다. 화성 야목리는 그가 삶에 지칠 때나 변화를 도모할 때마다 찾았던 곳이다.

매송보통학교를 다니던 조문기는 가난으로 학비를 낼 수 없어 용인 양지에 있는 외가에서 지내게 되었다. 승지를 지낸 외조부는 총독부가 들어서자 낙향했던 분으로 외손자에게 일제의 침략상을 알려주고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 조문기가 전학한 양지보통학교 설립자는 일진회를 만들어 나라를 넘기는데 앞장을 선 친일파 송병준으로 외조부와 대척점에 서 있었다. 제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각오를 다진 조문기는 경성사범학교 진학을 목표로 세우고 열심히 공부했다. 사범학교에 입학하면 학비를 전액 면제를 받으며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관부선을 타고 일본으로
합격을 자신했으나 결과는 낙방이었다. 낙심하여 서울 거리를 배회하던 16세 소년 조문기는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공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일본행을 결심했다. 1942년 10월, 조문기는 동경 근교에 위치한 군수회사 일본강관의 훈련공으로 입소했다. 조문기는 이곳에서 평생 동지 유만수를 만났다. 안성 출신의 유만수는 조문기보다 4살 연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갔다가 운동 조직과 연결되지 못해 일본으로 온 특별한 청년이었다. 한 방에서 생활하게 된 두 사람은 쉬는 날이면 서점과 도서관을 찾았다. 일본의 현대사를 살피던 중 관동대지진 때(1923년 9월 1일) 조선인 6천여 명이 학살당한 사실을 알고 조선인으로 학살에 앞장선 반역자박춘금에 복수하기로 다짐했다.

1944년 5월, 회사에서 ‘훈련공 교양서’라는 책을 배포했는데, 그 내용이 조선인을 멸시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훈련공들은 불성실하다, 밥만 많이 먹는다, 싸움질을 잘한다, 등등 조선인을 매도하는 책은 조선 청년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시절의 조문기 선생.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시절의 조문기 선생.

“이번 일을 방치하면 모욕과 차별이 뒤따를 것이다. 조선 청년이 멍청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유만수와 조문기가 치밀한 계획안을 세우고 파업을 조직했다. 파업 전날 밤에 두 사람은 기숙사를 빠져나와 잠적했다. 다음날 3천여 명의 조선청년들이 “조선인 차별을 철폐하라!”며 농성을 벌였다. 전시체제 하 군수공장에서의 파업은 이것이 유일하다. 파업을 주동한 두 사람은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전시라 통신이 원활하지 못해 신원 조회가 어려워 일손이 부족한 공장에 가명으로 취직하여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일본인 행세를 하며 지냈다. 1944년 말, 조문기는 유만수와 귀국해서 동지를 모아 비밀단체를 구성하고, 친일 거두와 침략 원흉을 처단한 후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인다는 계획을 세우고 귀국을 결정했다.

성공회대성당에서 겨레장으로 치뤄진 조문기 선생 영결식.
성공회대성당에서 겨레장으로 치뤄진 조문기 선생 영결식.

■부민회관 폭탄사건
두 사람은 곤경에 처한 재일한인들을 후원하던 서상한의 도움을 받아 도항증을 위조하여 1945년 1월에 빈털터리로 귀국했다. 체포 위험 때문에 조문기는 유만수의 집을 찾고, 유만수는 조문기의 집을 찾아 사정을 살펴보니 다행히 수배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두 달이 지난 1945년 3월, 서울 관수동 유만수의 집에서 ‘대한애국청년당’이란 비밀결사를 탄생시켰다. ‘애청’으로 불렀던 이 비밀결사에 참여한 동지 대부분은 일본강관회사의 훈련공 출신으로 파업에 참여했다가 헌병대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유만수를 의장으로 뭉친 애청은 세 번째 모임에서 거사계획을 확정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에 앞장선 박춘금, 군수품을 일제에 상납하던 화신재벌 박흥식, 독립투사를 잡아 중추원 참의까지 승진한 고등경찰 김석태 3인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것이었다. 동지들은 이들에 대한 정보 수집에 나섰다. 돈도 없고 마땅히 거처할 곳도 없었던 조문기는 수원에서 서울까지 백리 길을 고픈 배를 움켜쥐고 걸어서 다녔다. 유만수는 다이너마이트를 빼내오기 위해 변전소 작업장에 인부로 잠입했다. 단원들의 노력으로 폭파에 필요한 다이너마이트와 뇌관 2개도 확보했다.

1945년 7월 24일 저녁 9시, 애청 세 사람은 악질 친일파 박춘금이 주도하는 ‘아시아민족분격대회’가 열리던 서울 부민회관(현 서울시의회 별관)에 입장했다.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세력들은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나아가 수천 명의 조선인 민족지도자를 살해할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연 행사였다. 이 거사는 대회를 무산시키는 것이 1차 목적이었다. 식장에 가득 찬 조선인들을 확인한 애청 동지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직원처럼 위장하여 헌병이 지키고선 무대 앞에 시한폭탄을 설치했다. 심지에 불을 붙이고 유유히 밖으로 나왔다. 잠시 후 엄청난 폭음이 들렸다. 대회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대회는 해산되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폭파사건에 큰 충격을 받은 일제는 전국에 비상경계엄령을 선포하고 수사요원을 총동원하여 현상금 5만 원을 걸고 검거에 나섰다. 불령선인으로 불리던 요시찰 인물을 비롯한 600여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연행되었을 뿐 아니라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내가 범인이다”라고 자백한 사람만 수십 명에 이르렀다.

부민관 폭파 사건의 주역들.(왼쪽부터 강윤국, 조문기, 유만수)
부민관 폭파 사건의 주역들.(왼쪽부터 강윤국, 조문기, 유만수)

■친일 청산은 제2의 독립운동이다
부민관 폭파 의거를 치른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일제가 패망했다. 해방 정국에서 부민관 폭파의 주역인 20세의 청년 조문기는 독립운동가에게도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정세는 기대와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미군은 건국준비위원회는 물론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일제시대에 종노릇 했던 경찰과 관료를 그대로 수용했다. 조문기는 백발이 성성한 독립투사들의 탄식을 들었다.

“고생고생하면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했는데…이 나라는 친일파의 나라가 될 거야”

독립운동세력은 지역과 좌우로 나뉘어 대립했다. 미소 군정이 실시되면서 한반도는 결국 분단되었고, 좌우투쟁은 격화되었다. 미군정과 이승만은 친일 경찰과 관료를 끌어들여 민족운동을 탄압하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조문기는 남북협상을 지지하고 분단을 반대하는 통일운동의 길에 나섰다. 이런 와중에 조문기는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모친의 갑작스런 별세로 모든 일에 뜻을 잃은 그는 대전 계룡산에 들어가 ‘조도령’으로 불리며 한동안 죽은 듯이 지냈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조국의 운명을 아주 외면할 수 없었다.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밀어붙이던 1948년 6월 2일 밤, 조문기는 동지들과 서울 삼각산 6개 봉우리에 봉화를 올리고 ‘통일정부 수립하자’, ‘단일정부 수립반대’, ‘미군은 물러가라’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시내에 내걸기 위해 하산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조문기는 악명 높았던 친일경찰 김종원에게 고문을 받고 1년 6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온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출범한 반민특위 간부들이 이승만의 명을 받은 친일경찰들에게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나갔고, 보름 후에는 백범 김구가 암살되었다.

분단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동족상잔의 참화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조문기는 10여 년간 유랑극단 배우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1959년 ‘이승만 대통령 암살, 정부전복음모 조작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또 수난을 당했다. 이후 그의 삶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다.

부민관 자리였던 서울시의회 본관 앞에서 노제가 열렸다.
부민관 자리였던 서울시의회 본관 앞에서 노제가 열렸다.

조문기는 하나뿐인 딸마저 친척 집에 맡겨야 할 정도로 궁핍했다. 그의 동지들 형편도 마찬가지였다. 중랑천 다리 밑 판잣집에서 사는 유만수는 폐병 3기가 되었고, 강윤국은 20년 이상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와 동지들은 1962년부터 시행된 독립유공자 신청을 거부했다. 두 동지의 악화된 건강과 가족들의 고생을 보다 못한 그가 두 동지를 설득해 1977년 독립유공자로 등록했다. 그러나 조문기 자신은 포상을 신청하지 않았다. 1982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장인 장모를 지켜보던 사위가 장인 몰래 신청하여 독립유공자에 올랐다.

조문기 선생은 1985년부터 광복회 경기도 지부장을 지내고, 민족문제연구소 2대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친일파인명사전을 발간에 온 힘을 쏟았다. 80평생을 자주독립과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한 선생은 2008년에 별세했다. 화성시 매송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동상 옆에는 다음과 같은 어록이 새겨져 있다.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요,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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