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자신을 버려야 자신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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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교수가 법무부 장관에 임명된 것에 대한 국민 여론이 극렬하게 나뉘고 있다. 그리고 후대에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 역시도 나뉘리라 생각한다. 나는 조국 장관에 대한 온전한 평가는 앞으로 그가 장관직을 수행하며 걸어가는 길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제7장에 ‘천장지구(天長地久)’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땅은 영원히 오래간다는 말이다. 그다음 천지가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을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이 장구한 이유는 ‘자기부터 살겠다고 하지 않기 때문[以其不自生也]’이라는 것이다. 신라 최치원(崔致遠)의 격황소서(檄黃巢書)로 한국에 잘 알려진 황소(黃巢, 835-884)의 난(875-884)이 있던 시기로 북송이 중원을 통일할 때(960)까지 거의 80여 년 동안 아비규환의 시대였던 당대(唐代) 말기와 오대(五代)의 대혼란기에 살았던 풍도(馮道, 882-954)라는 이가 있다. 그는 후량(後梁)을 시작으로 다섯 왕조를 거치면서 40여 년 동안 13명의 군주를 섬기면서, 재상을 지낸 기간만 20년이 넘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동아시아 한자문명권에서 극명하게 나뉜다.

유가적 지향 인물들은 그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에 어긋나는 인물이었기에 혹독한 평가를 한다. 『신오대사(新五代史)』에서 송대의 구양수(歐陽修, 1007-1072)는 “염치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였고,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간신의 수괴”라고 하였다. 그리고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에서 호삼성(胡三省, 1230-1320)은 “지위가 신하로서는 최고위까지 올랐건만 나라가 망해도 죽지 않고 그 군주들을 행인 취급한 위인”이라고 비난했다.

반면에 어떤 이는 그를 절박한 시대에 역사적 소명을 충실히 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송대(宋代)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은 “자신을 굽히면서까지 사람들을 평안히 해준” 인물로 평가하며, 부처님이나 보살과 같은 격이라고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라의 걸왕을 섬기다 나중에 은나라의 탕왕을 섬긴 이윤에 그를 비유하기도 하였다. 명대의 이지(李贄, 1527-1602)는 풍도가 간신, 변절자라는 치욕스런 평가를 희생적으로 감수한 것이라 보았고, 그가 이런 희생을 감수한 까닭이 ‘도탄에 빠진 무고한 백성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현대의 남회근(南懷瑾, 1928-2012) 역시 풍도를 노자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현명한 인물로 평가한다.

나는 여기서 누구의 평가가 더 옳고 그른지를 논하지 않겠다. 다만, 그의 평소 성품과 생활태도, 그리고 그의 업적은 무엇이고, 왜 역사적 평가가 갈리는지를 생각해보고 싶다. 그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는데, 거친 음식과 남루한 옷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주경야독을 하며 낮에는 일을 열심히 하고 밤에는 공부를 열심히 하였고, 높은 관리가 되어서도 수행원과 한솥밥을 먹으며 검소하였고 소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정치적 수완이 남다르고, 윗사람이나 아랫사람 누구에게나 칭송을 들을 정도로 대인관계가 원만하였다고 한다.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손꼽히고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최초로 구경(九經)을 목판으로 판각하고 인쇄해 간행했다는 것이다. 남회근이나 이지, 왕안석의 풍도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인 이유는 “자신의 사사로움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조국 장관이 자신의 사사로움을 취하지 않고, 국민과 국가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장관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그가 그 자리를 떠났을 때, 자신을 비난하고 비판했던 이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장관이 되길 바란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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