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5. 경북 안동, 하회마을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5. 경북 안동, 하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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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고택 100채 즐비…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
입교당에서 본 병산서원 만대루(晩對樓) / 병산과 낙동강이 어우러진 절경이 펼쳐진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 선생을 주향으로, 셋째 아들 류진을 종향으로 모신 사액서원으로,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됐다. ‘만대(晩對)’는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시「백제성루(百帝城樓)」“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니(翠屛宜晩對)”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백제성은 삼국지의 영웅 유비가 이릉 전투에서 육손이 이끈 오나라 군에 참패하고 죽어간 곳이다.
입교당에서 본 병산서원 만대루(晩對樓) / 병산과 낙동강이 어우러진 절경이 펼쳐진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 선생을 주향으로, 셋째 아들 류진을 종향으로 모신 사액서원으로,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됐다. ‘만대(晩對)’는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시「백제성루(百帝城樓)」“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니(翠屛宜晩對)”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백제성은 삼국지의 영웅 유비가 이릉 전투에서 육손이 이끈 오나라 군에 참패하고 죽어간 곳이다.

내하전차기복 후불지개 지금상순차도철 여차이망기무사자 특행이
奈何前車旣覆 後不知改 至今尙循此塗轍 如此而望其無事者 特幸耳
앞 수레가 이미 엎어졌는데 어찌 뒤에도 고칠 줄 모르고, 엎어진 바퀴 자국을 따른다.
이러고도 무사하기를 바라니 요행만 믿는 노릇 아닌가?

- 징비록 녹후잡기(錄後雜記)에서

하회(河回)는 ‘물돌이’의 이두식 표기다. 안동에서 하회마을이라는 표현을 쓰면 무식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경주 양동도 양동 마을이 아니라 그냥 양동이다. 하회는 낙동강이 마을을 크게 한 바퀴 휘감아 흘러 만든 마을이다. 경북 예천 ‘회룡포’나 단종이 귀양가 살던 강원도 영월 ‘청령포’와 지형이 비슷하다. 외부의 접근이 매우 어려워, 한반도에 닥친 숱한 전란도 피했다. 풍수에서는 안동의 내압, 검제와 함께 천년불패지지(千年不敗之地), 천 년 번영할 마을이라는 말을 쓴다. 천변이면서도 영남 일대를 강타한 사라호 태풍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니 정말 천 년 불패인가 보다.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연꽃이 물에 떠있는 형국이라고도 한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명당은 명당을 얻어 자리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명당이 값하려면 꾸준히 덕을 쌓아야 한다. 서애가 벼슬길에 올라 나라에 봉사하고 국난 극복에 기여했다면, 형 겸암 유운룡은 고향에서 몸과 마음을 닦고 후학을 양성했다. ‘독립운동가의 집’ 표지도 몇 집 건너 대문에 붙어 흔해 보일 정도다. 안동 일대 양반촌이 대부분 그렇지만, 하회 역시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둘째 가라면 서럽다.

하회는 서애 류성룡 선생이 자라고, 은퇴하고 나서 살면서 징비록(懲毖錄, 국보 132호)을 쓴 곳이다. 서애 선생은 임진왜란, 하마터면 조선 나라가 없어질 뻔한 대란 7년 내내 선조를 가까운 거리에서 모셨다. 전란 전에는 충무공 이순신과 행주대첩의 권율을 천거해 수륙군의 중핵으로 앉히고, 전술서적을 구해 이순신에게 보내 왜구 침략에 대비케 했다. 전란이 벌어지자 크게는 명나라와의 교섭을 전담했고, 작게는 나루청을 태워 몽진 길의 횃불로 쓰고 칡덩굴을 모아 대군이 강을 건널 부교를 만드는 임기응변까지, 국가 위기 극복을 총지휘했다.

양진당 사랑채 / 양진당은 풍산류씨 대종택으로 당호 현판은 서애 선생의 부친으로 관찰사를 지낸 입암 류중영(立巖 柳仲郢)의 호를 딴 것이다. 사랑채 지붕 오른쪽은 팔작지붕인데 중문채 지붕과 맞닿은 왼쪽은 맞배지붕으로 간단히 처리했다. 굵은 둥근 기둥에 간결하면서도 당당한 창살, 툇마루에 장식한 계자난간 등이 선비의 단정함과 명문대가의 당당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양진당 사랑채 / 양진당은 풍산류씨 대종택으로 당호 현판은 서애 선생의 부친으로 관찰사를 지낸 입암 류중영(立巖 柳仲郢)의 호를 딴 것이다. 사랑채 지붕 오른쪽은 팔작지붕인데 중문채 지붕과 맞닿은 왼쪽은 맞배지붕으로 간단히 처리했다. 굵은 둥근 기둥에 간결하면서도 당당한 창살, 툇마루에 장식한 계자난간 등이 선비의 단정함과 명문대가의 당당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징비록’은 ‘시경’ ‘주송(周頌)’ 중 ‘소비편(小毖篇)’ 첫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預其懲而毖後患(예기징이비후환)’, 지난날 과오를 아프게 되새기면서 다시는 환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한다. 왜란을 교훈 삼아 다시는 그 전철(前輟)을 밟지 말자, 이게 다였을까? 덜떨어진 임금 7년 모시고 다니며 피눈물 흘린 분이 하고 싶은 말이 더 없었을까? 시경 구절을 다시 살펴보자. ‘預其懲而毖後患’의 댓구는 ‘莫予蜂自求辛(막여병봉자구신석), 내 꿀벌을 손에 놓고 만지다 스스로 독바늘에 쏘였구나.’다. 주나라 성왕이 한때나마 간신을 총애해 반란을 자초한 자신을 후회했다는 해석이 단서다.

변덕 심한 선조는 의주로 몽진가는 와중에 하루 사이 영의정을 세 명 갈아치운다. 아계 이산해에서 서애 선생, 다시 정철. 정철은 조작된 기축옥사의 위관(주심관)을 맡아 영남과 호남의 무고한 선비 1천500명을 참살한 죄로 평안도 강계에 유배가 있었다. 다시 불려온 정철의 국난 중 활동상은, 체찰사로 임무를 소홀히 하고 명나라 조정에 거짓 보고를 해 오해를 샀다는 민망한 기록뿐이다. 없느니 못한 정승 정철! 가사문학의 거장 이미지가 여지없이 박살 나는 순간이다.

혹시 정철의 등용을 빗대 ‘징비’라 한 것은 아닐까? 국가 위기에 여전히 간신배를 가까이 둔 선조를 풍간(諷諫)한 것은 아닐까? 징비록에는 아무 언급이 없다. 다만, 서애가 후에 스승 이황의 문집 ‘퇴계집’을 편찬하면서, 정철에 대한 스승의 언급을 삭제한 데서 정철에 대한 서애의 평가를 알 수 있겠고 ‘징비’에 뭔가 실마리를 얻는다.

충효당 사랑채 /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계단을 놓았다. 민가로서는 흔치 않게 굵은 둥근 기둥을 받치고, 높지 않은 퇴에도 계자난간을 둘렀다. 대청마루 안쪽으로 살짝 보이는 현판의 ‘충효당(忠孝堂)’ 글씨는 당대 명필 미수 허목(眉叟許穆)의 솜씨다.
충효당 사랑채 /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계단을 놓았다. 민가로서는 흔치 않게 굵은 둥근 기둥을 받치고, 높지 않은 퇴에도 계자난간을 둘렀다. 대청마루 안쪽으로 살짝 보이는 현판의 ‘충효당(忠孝堂)’ 글씨는 당대 명필 미수 허목(眉叟許穆)의 솜씨다.

고담준론은 여기까지, 우리에게는 현실로 돌아가 하회 즐기는 법이 중요하다. 하회는 영국 여왕과 왕세자 모자가 다녀간 곳이며, 경주 양동과 함께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다. 길 건너 서애를 모신 병산서원도 세계문화유산이다. 대개 전통 마을에서는 가장 큰 기와집이 가장 중요한 고택이지만 하회는 다르다. 규모로는 18세기 말 지어진 북촌댁이 으뜸이지만, 16세기 이전 지어진 풍산류씨 대종가인 양진당(養眞堂, 보물 306호)과 17세기 초 지어진 서애 종가 충효당(忠孝堂, 보물 414호)을 먼저 찾아야 한다. 남촌댁, 주일재, 작천댁, 하동고택 등 기와 고택만 100채 가까이 즐비한 인류 문화의 보고다.

하회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부용대, 서애가 기거하던 옥연정사(玉淵精舍), 원지정사(遠志精舍), 서애의 형님인 겸암 류운룡이 책 읽고 공부하던 겸암정사(謙菴精舍), 빈연정사(賓淵精舍)까지 즐겨야 한다. 일정을 넉넉하게 잡아야 한다. 급하게 와서 셔틀버스로 마을로 들어가 휙 돌아보고 떠나지 말기를. 주차장에서 강 언덕을 걸어 마을로 들어가면 훨씬 좋다. 하회를 눈으로 볼 수 있으니. 수백 년 된 노거수에 소원 찍지도 달고. 여유 있게 다닐수록 얻는 게 많다. 하루쯤 묵어가면 더 좋을 것이다. 우리 생애 언제 다시 세계문화 유산을 하루 두 군데나 즐길 것인가?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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