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2. 만주에서 독립군을 기른 위대한 교육자 여준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2. 만주에서 독립군을 기른 위대한 교육자 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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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이역 땅서 ‘풍찬노숙’… ‘무장독립 투쟁’ 일념
 신민회가 결성된 곳이며 여준 선생이 상동청년학원 교사로 일했던 상동교회. 여러가지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왼편에 서 있는 분이 여준 선생으로 보이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 여준 선생이 교장으로 재직했던 신흥무관학교 터.  여준은 신흥무관하교와 그 후신으로 설립한 검성학교의 운영을 학생들이 농장을 운영하는 ‘둔전제’ 방식을 활용하여 자급자족하려고 노력했다.
 신민회가 결성된 곳이며 여준 선생이 상동청년학원 교사로 일했던 상동교회. 여러가지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왼편에 서 있는 분이 여준 선생으로 보이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 여준 선생이 교장으로 재직했던 신흥무관학교 터.  여준은 신흥무관하교와 그 후신으로 설립한 검성학교의 운영을 학생들이 농장을 운영하는 ‘둔전제’ 방식을 활용하여 자급자족하려고 노력했다.

시당(時堂) 여준(呂準,1862~1932)은 1862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에서 태어났다. 외가인 용인 원삼면 일대는 해주 오씨 집성촌이었다. 고향 원삼면에서 해주 오씨 가문에서 세운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다. 여준은 ‘한학의 석학’ 재당숙 여규형의 도움으로 20대 이후에 상경하여 한성 회현동에 살았다. 이때부터 여준은 여규형의 주선으로 이웃에 살던 이상설(1870~1917), 이회영(1867~1932), 이시영 형제와 어울리며 한학과 신학문을 두루 섭렵하게 되었다. 때로는 벗들과 절에서 합숙하며 공부하기도 했다. 여준의 재주는 친구들 중에서 빼어나 이시영은 그를 “절재(絶才)”라고 불렀다.

여준이 신학문을 익히던 무렵 나라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 연이어 을미사변과 아관파천(1896)이 벌어졌다. 1896년에는 독립신문이 발행되고, 독립협회가 조직되어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이제까지 숨죽이며 살던 민중들이 제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벌어진 엄청난 변화를 지켜보며 여준은 이상설, 이회영 등 벗들과 외국의 신간서적을 구입하여 신사조를 연구하며 위태로운 나라를 구할 방안을 궁리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당시 의정부 참찬이던 이상설이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오적을 죽이고 조약 파기를 선언하라고 주장했다. 많은 지사들이 목숨을 끊으며 저항했으나 국권은 일제의 손아귀에 맡겨졌다. 이 무렵 여준은 남대문에 자리한 상동교회를 드나들었다. “상동교회 뒷방에는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이회영, 이상설, 이준 등 지사들이 무시로 모여와 국사를 모책했는데”라는 최남선의 증언처럼 상동교회는 당시 민족운동의 요람이었다.

용정 서전서숙과 오산학교에서 민족 교육에 힘쓰다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동지들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1906년 10월 이상설과 이동녕이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북간도 용정촌에서 제일 큰집을 사들여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우고 한인 청소년을 모집했다. 이상설이 숙장을 맡고 여준은 교사로 참여하여 한문, 정치학, 법학 등을 가르쳤다. 이듬해 4월 이상설이 헤이그밀사로 파견되면서 숙장을 그만 두고, 이동녕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면서 여준이 2대 숙장을 맡았다. 그러나 학교는 재정난에 허덕이고 일제의 감시와 방해가 극심해졌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여준은 서숙의 폐교를 선언하고 일제의 눈을 피해 학생을 데리고 훈춘현 탑두구로 옮겨 서전서숙을 다시 건립했다. 이곳에서 학생을 더 모집해 3개 반 74명의 학생들을 1년간 단기 속성과정으로 졸업시키고 학교 문을 닫았다.

귀국한 여준은 상동청년회 교사로 참여했다. 1906년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우리 역사 최초로 공화정치를 내세운 비밀결사 신민회가 결성되었다. 신민회라는 이름은 국권을 되찾았을 때 새로운 나라의 주인이 ‘민(民)’이라야 한다는 이념에서 비롯되었다. 신민회는 민중을 계몽하는 교육 사업에 주력했다. 여준은 신민회에서 만난 남강 이승훈(1864~1930)의 요청으로 오산학교(五山學校) 설립에 참여했다. 1907년 12월 24일 오산학교 개교식이 거행됐다. 교사는 여준과 서진순, 학생은 단 7명으로 시작한 학교였으나 곧 명문사학으로 전국에 이름을 떨쳤다. 여준은 역사 지리 산술을 가르쳤고, 육군연성학교 교관 출신인 서진순은 체육을 맡았다. 학생들은 아침마다 애국가와 여준이 지은 교가를 불렀다. “뒤 뫼의 솔빛은 항상 푸르리/ 비에나 눈에나 변함없이/ 이는 우리 정신 우리 학교로다/ 사랑하는 학교 오산학교”

한 동안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춘원 이광수는 여준을 평생 잊지 못할 분이라며 이렇게 추억했다.

“내가 오산학교에 부임하였을 때 교원 중에서 가장 어른 되는 분은 여준이었다. 그는 백발이 성성한 노학자로서 키는 작고 목소리는 크고 야무졌으며 높은 식견을 가진 애국지사로서 학생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

학교 업무를 대부분 여준이 처리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여준을 교장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여준은 신민회의 요청으로 상동청년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서울까지 먼 거리를 오가며 바쁘게 생활했다. 1910년 7월에 제1회 졸업식이 열렸는데 이때 이승훈은 졸업생들에게 정직과 성실을 강조하고 여준은 이를 실행할 것을 당부했다.

“천만 가지 재주를 배웠더라도 실행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니 우리가 4년 동안에 ‘나라를 사랑하라, 민족을 구하라’는 말은 남강 선생 이하 여러 사람이 귀가 아프도록 말한 것이니 그것만 실행하여 준다면 아무 근심이 없겠다.”

오산학교와 상동청년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여준은 1908년, 이웃과 친지들을 설득하여 고향에 삼악학교(三岳學校)를 세웠다. 상동청년학원에서 가르친 고향 출신의 제자 오광선이 삼악학교의 교사로 헌신했다. 훗날 오광선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여준이 설립한 검성학교의 교사를 지냈으며 광복군 지대장으로 활약했다.

보재 이상설이 설립한 서전서숙에서 여준 선생은 교사와 숙장으로 일했다.
보재 이상설이 설립한 서전서숙에서 여준 선생은 교사와 숙장으로 일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다
1910년 8월, 나라가 사라졌다. 여준은 서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기로 결정한 신민회의 결정에 따라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형의 가족을 대동하고 압록강을 건넜다. 1912년 말, 여준이 서간도 합니하에 도착했을 때 신흥무관학교를 책임지고 있던 이상룡과 윤기섭, 김창환 등이 맞아주었다. 학교를 설립한 이석영, 이회영 6형제와 이동녕 등은 일제의 암살계획을 듣고 피신하였던 것이다. 영어를 가르치던 여준은 1913년부터 교장에 취임했다. 여준은 부족한 교사를 충당하기 위해 자신이 오산학교에서 가르친 제자들 중에 교육 경험이 있는 사람을 서간도로 불러들였다. 신흥무관학교를 후원하던 경학사가 재정난으로 활동이 정지되었다. 여준은 부족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졸업생과 재학생을 중심으로 신흥학우단을 조직했다.

여준은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조회 시간에 애국가와 교가를 우렁차게 부르는 학생들 앞에서 자주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여준은 학생들에게 “모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강하게 교육했다. 교육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음식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좀 먹은 좁쌀 밥에 콩기름에 절인 콩장 한 가지 뿐이었다. 수업을 마치면 중국인에게 야산을 빌려 만든 밭에 나가 농사를 지었다. 겨울이면 허리까지 차는 눈을 헤치며 땔감을 마련해야 했다. 이처럼 환경은 열악했으나 교사나 학생은 자긍심이 넘쳤다. 1917년 여준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에서 물러나 길림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준의 동향을 보고한 기밀문서
여준의 동향을 보고한 기밀문서

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주도하다
1917년 12월 여준은 김약연, 정안립 등과 동성한족생계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만주로 이주한 동포를 구제하는 활동을 벌여나갔다. 이듬해 4월 일제가 작성한 ‘재외 불령선인의 활동에 관한 건’에 여준의 움직임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합니하 신흥학교 전 교장 여준은 올 1월 흑룡강성 방면 여행 중 이시영을 만나 2월 15일 합니하로 출발 밀정단을 조직하여 독로(독일과 러시아)에 공헌하여 그 대가로 국권회복의 후원을 구하려는 계획이다.”

1919년 2월 27일, 여준은 자신의 집에서 박찬익 황상규 김좌진 등과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했다. 정령에 추대된 그는 다음날 긴급회의를 열어 구미에 독립선언서를 보낼 것을 결의했다.

여준은 대한독립의군부 정령의 자격으로 대종교 교주 김교헌을 비롯한 국외 독립운동 지도자 38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국내의 3·1운동에 보조를 맞추어 해외에서도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여준이 결성한 한족회는 임정 산하에서 군정부의 역할을 담당하기로 결의하고 ‘서로군정서’로 명칭을 바꾸었다. 서로군정서 부독판으로 임명된 여준은 사령관 지청천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했다. 10월에는 무장투쟁조직인 급진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취임하여 독립군을 모으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이를 위해 하얼빈에서 러시아를 통해 총 500정을 구입했으며, 백두산 부근에 사무소를 설치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독립운동의 영웅
무장투쟁만이 독립을 쟁취하는 길로 확신했던 여준은 임시정부의 준비론을 강하게 비판했다.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했으나 그 변화가 기대에 못 미치자 신흥무관학교에 돌아와 독립군 양성에 전념했다. 1922년 여준은 액목현에 검성중학교를 세우고 교장을 맡아 신흥무관학교의 뒤를 잇고자 했다. 학생들과 함께 농사를 지어 학교 운영비를 마련했다. 1930년에는 북만주 위하현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에도 참여하여 고문으로 활동했다. 일흔을 앞 둔 나이였다. 1931년 9월 일제가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 위한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만주의 독립군 기지조차 본토로 옮겨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이 무렵 여준의 동지들도 하나 둘 곁에서 사라져갔다. 평생 동지였던 이회영, 이상룡이 세상을 떠났다. 70 평생을 이역 땅에서 풍찬노숙하며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여준도 이역 땅에서 눈을 감았다. 위대한 교육자이자 독립투사인 여준 선생의 이름은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었다. 1968년 정부는 선생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김산(홍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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