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3. 조국 광복에 모든 것을 바친 거인… 영석 이석영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3. 조국 광복에 모든 것을 바친 거인… 영석 이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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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귀영화 내던지고 만주行… 독립투사 양성 ‘올인’
▲ 이석영 선생
▲ 이석영 선생

1910년 12월 30일 이른 새벽, 한 무리의 사람들이 칼바람을 맞으며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은 영석 이석영(李石榮, 1855~1934)과 우당 이회영(1867~1932)을 비롯한 6형제와 그 가족들이었다. 고위 관직을 벗어던지고 청년교육에 앞장섰던 월남 이상재가 이 소식을 듣고 이렇게 탄식했다.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한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와 가족 40여 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이 무렵 이동녕, 이상설, 김동삼을 비롯한 동지들도 이회영 6형제가 자리 잡은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을사늑약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지들이다. 서간도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도 신민회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다
영석(潁石) 이석영은 1855년 서울에서 이조참판을 지낸 이유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석영은 6형제 중 둘째다. 그는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남양주에서 살게 되었다. 양부 이유원은 대원군의 정적으로 꼽히기도 했던 인물로 남양주에서 서울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왕래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갑부였다. 이석영은 양부로부터 현재의 시세로 계산하면 1조 원이 넘는다는 큰 재산을 물려받았다. 21세에 과거에 급제해 승지를 비롯한 요직을 지내고, 2품 장례원 소경이란 벼슬을 받았으나 적성에 맞지 않고 몸이 약해 직무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대며 사직 상소를 올리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의 아우 이회영과 이시영 역시 한학과 신학문을 두루 익히고 일찍부터 국권회복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 1904년 상동청년학원 함감으로 있던 이회영이 아들과 조카들의 머리를 단발시켜 학교에 입학시키자 처음에는 꾸짖던 그도 신학문의 필요성을 설명하자 곧 공감하고 자신의 아들은 물론 주위에도 입학을 권할 정도로 생각이 유연했다.

만주에 도착한 이들은 중국인처럼 보이기 위해 변발하고 중국옷으로 갈아입었다. 땅을 매입하기 위해 나섰으나 만주인들은 낮선 조선인들이 몰려들자 자신들을 쫓아내려 한다고 생각하고 땅을 팔려 하지 않았다. 이시영이 관직에 있을 때 교류를 가졌던 청나라의 군벌 위안스카이를 만나 사정을 설명해 이 문제를 풀었다. 그러나 만주인들의 적대적인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석영이 중국 옷을 차려입고 화려한 가마를 빌려 타고 거리에 나가면 그를 만난 만주인들은 ‘황제가 나타났다’며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비치게 해 배타적인 만주족을 굴복시켰던 것이다. 우당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에는 이 무렵의 사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만주로 이주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우당 6형제
만주로 이주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우당 6형제

“둘째 영감은 항상 청년들의 학교가 없어 염려하시다가 토지를 사신 후에 ‘급한 게 학교라, 춘분 후에는 학교 건설을 착수하게’ 선언을 하시고 토지 수천 평을 내 놓으시고 양식과 땔나무까지 부담하시고 아우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거금을 들여 토지를 확보한 후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다. 교육과 사업을 병진하는 경학사는 훗날 서로군정서로 발전해 남만주 독립운동의 총본산이 되었다. 만주인들이 옥수수를 저장하던 창고를 개조해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신흥(新興)이란 민주공화정을 추구하는 신민회의 ‘신’자와 다시 일어난다는 ‘흥’자를 합친 것이다. 이석영은 이사장격인 교주(校主)를 맡아 학교 운영을 책임졌다. 당시 군사교육을 담당한 교관은 이장녕, 이관직, 김창환으로 대한제국에서 설립한 무관학교의 특별 우등생 출신들이다. 님 웨일즈가 지은 <아리랑>의 주인공 혁명가 김산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그는 신흥학교의 특별한 교육 방식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합니하에 있는 대한독립군 군관학교. 이 학교는 신흥학교라 불렀다. 학과는 새벽 4시에 시작하며 취침은 저녁 9시에 했다. 우리는 군대 전술을 공부했고 총기를 가지고 훈련받았다. 그렇지만 가장 엄격하게 요구됐던 것은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 게릴라 전술은 한국의 지세, 특히 북한의 지리에 관해서는 아주 주의 깊게 연구했다. -그날을 위해.”

■2천의 독립군을 기른 거목의 풍모
장래의 독립군을 육성하는 신흥무관학교는 학비와 숙식도 무료였다. 그런데 1911년 지독한 흉년이 들어 미곡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그 많던 자금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한인촌을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몇몇 개인의 기부와 헌신으로 운영하기에는 벅찬 사업이었다. 신민회는 국외에 독립운동기지와 무관학교의 설립을 계획하면서 총 75만 원의 자금을 모아 전달하기로 결의했었다. 그러나 1911년 9월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으로 간부 700여 명이 검거되고 그중 105명이 구속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동지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섰다. 학생들은 봄에는 들판에 나가 밭을 개간하고 가을에는 산에 올라 땔감을 마련했다. 대갓집에서 하인들을 부렸던 부인들도 학생들의 해진 옷을 깁고 찬물을 길어다 밥을 지었다. 소문을 듣고 학생들이 몰려들자 학술과 훈련을 함께 배우던 것을 본과와 특별과로 나누었다. 본과는 중학 과정이고 특별과는 사관양성의 속성 과정이었다. 일제는 신흥강습소가 이름과 달리 무관을 양성하는 군사학교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파괴공작에 나섰다. 당시 이 무렵 이석영, 이동녕을 비롯한 신흥강습소를 운영했던 간부들의 동정을 기록한 기밀문서가 여럿 남아있다. 학교 측에서도 학생들에게 아무런 연락도 없이 나타나는 사람은 조사해서 처단하도록 교육했을 정도였다.

이석영 형제들의 독립운동 행적이 담긴 ‘서간도 재주불령선인 조사’. 해당 문서는 일본군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독립운동가)’을 정리한 것이다.
이석영 형제들의 독립운동 행적이 담긴 ‘서간도 재주불령선인 조사’. 해당 문서는 일본군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독립운동가)’을 정리한 것이다.

1913년 봄 경기도 출신의 한 동지가 찾아와서 이동녕, 이회영, 이시영 등 핵심 간부를 암살하거나 체포하기 위해 편성된 고등계 형사들이 만주로 출발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전해주었다. 러시아에 있는 동지 이상설도 비슷한 사연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심사숙고 끝에 이름이 거명된 사람들은 신분이 노출된 것이니 각각 흩어져서 활동하기로 했다. 이회영은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로, 이시영은 심양으로, 이동녕은 러시아로 떠났다. 교주인 이석영은 학교와 가족을 돌보기로 했다. 국내로 들어갔던 이회영은 천신만고 끝에 다시 중국으로 탈출했으며, 이시영은 북경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우와 동지들이 떠나자 생활은 물론 학교 운영도 더욱 어려워졌다. 총을 든 마적들에게 잡혀갔다 풀려나고 가족들이 총상을 입기도 하는 등 험한 환경에서 10년을 버티던 이석영도 1920년 무렵 북경으로 터전을 옮겼다. 1920년 신흥무관학교는 폐교할 때까지 2천1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많은 졸업생이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에 참전해 일본군 1천2백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의열단원 중에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많았다.

■영원히 빛날 그 이름, 영석 이석영
아우와 아들, 동지들이 활동하고 있는 중국 도시의 생활도 녹록하지 않았다. 이석영 형제들과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이관직이 지은 <우당 이회영 약전>에 이석영과 이회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세태를 안타까워했다.

“영석, 우당, 성재(이시영의 호), 세 사람을 살펴보면 성재는 그 지조와 절개, 덕망, 사업 등에 있어서 형인 영석, 우당 두 사람에게 양보하실 듯한데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성재는 알지만 영석, 우당은 아는 이가 드물다.”

1920년대 후반이 되면 독립운동 자금줄이 다 막혀 상해 임정 요인들도 거지나 다름이 없었다. 상해에서 발행되던 <한민>(1936년 5월)에 ‘서간도 초기 이주와 신흥학교 시대 회상기’에 실린 글은 이석영의 늠름한 기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석영이 수많은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운영에 모두 쏟아 붓고 나중에는 지극히 곤란한 생활을 하면서도 한 마디 원성이나 후회하는 빚이 조금도 없고 태연해 장자의 풍모가 있었다.”

1932년 봄, 한국인의 기상을 세계만방에 떨친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상해에 있던 임정은 내륙으로 계속 이동해야 했다. 아우들도 상해를 떠났다. 78세의 상노인이 된 이석영은 동지들의 짐이 되지 않으려 상해에 남았다. 돌봐주는 이가 없는 상해에서 돈이 없어 두부 비지로 연명하던 이석영은 1934년 쓸쓸하게 운명했다. 그 많던 재산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다 쓰고 굶주리다 세상을 떠난 위대한 이석영 선생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다.

최근 남양주에서 ‘이석영광장’을 조성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렇다. 한 사회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분들의 이름을 추모하는 사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남양주시의 결정에 큰 박수를 보낸다.

유하현 삼원보의 신흥무관학교 자리.
유하현 삼원보의 신흥무관학교 자리.

김산(홍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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