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完. 에필로그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完.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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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들이 흘린 ‘땀과 피’… 대한민국을 세우다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만 35년 동안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나라를 빼앗기고 총칼의 위협을 받으며 10년 동안 숨죽여 살던 한민족이 떨쳐 일어선 기미년 3월 1일은 자유와 독립의 향한 한국인의 열망을 세계만방에 드러낸 위대한 날이다. 3·1운동 이후 많은 지사가 망명길에 올랐다. 만세운동에서 독립의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이며, 평화로운 운동으로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 유학자와 기생이 나서고, 종교와 종교가 연대하다
조선 500년의 통치이념인 유학은 나라가 망국의 위기에 처했으나 무기력했다. 독립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때에 일본인이 주는 밥을 거부하고 대마도에서 굶어 죽었던 면암 최익현(포천)의 의기는 의병항쟁의 불씨가 되었다. 화성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학자 이정근도 유학의 한계를 극복한 선각자라 할 수 있다. 3·1운동 이후 유학자들도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사실을 반성하며 파리장서를 시작으로 구국운동의 대열에 나서기 시작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이필주와 이종훈은 천도교와 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흥미롭게도 두 분 모두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은 이름 없이 살아가던 평민을 민족의 앞날을 이끄는 지도자로 키워냈다. 1896년 4월 한글로 만든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독립협회가 조직되었다. 독립협회가 정부와 손을 잡고 주최한 만민공동회는 백성에서 시민이 탄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처럼 일제를 비롯한 외세의 손을 빌리지 않고 우리 겨레 스스로 민주주의를 실험했던 것이다. 일제의 통치에서 해방된 지 74년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근대와 경제적 발전이 마치 일본의 통치 덕분이라고 주장하는 자칭 지식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목숨을 걸고 일제와 전쟁을 벌였던 독립투사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의 망언이 계속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자신이 선 자리에서 구국의 길을 모색하다
주권을 빼앗긴 식민지 조선에서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고통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식민지 현실을 수용하고 침묵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수원 기생 김향화는 경찰서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감옥에 갇혀서도 만세를 불렀던 김향화의 당당한 태도는 함께 수감된 동지들에게 힘이 되었다. 겨레의 상록수로 살아 있는 최용신(안산)은 교육을 통한 구국의 길을 선택한 분이라면 한결 김윤경(광주)은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분이다.

20세기 초 일제가 한민족의 숨통을 조여 오는 엄중한 현실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전하는” 언론의 사명은 막중한 것이었다. 석농 류근(용인)은 붓으로 일제의 침략을 고발했다. 그의 붓끝은 역사 저술로 확대되었다.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역사서를 저술해 식민지 청년들의 마비된 의식을 일깨웠다. 그의 동지 무원 김교헌(수원)은 우리 민족의 시원인 단군의 역사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해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제시했다. 한국기독교가 민족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것은 특별한 사례라 할 것이다. 그것은 선교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유학의 한계를 직시하고 스스로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한국기독교의 독특한 전통에 힘입은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구연영 부자는 성경과 기독교를 통해 구국의 길에 나섰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발하게 벌인 무장투쟁의 중심에는 대종교가 있었다. 대종교는 독립운동을 위해 존재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 민족종교이다. 경기도 출신의 쟁쟁한 독립지사 중에도 대종교인이 여럿이다. 그중에서 2대 교주를 지낸 무원 김교헌은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의 숨은 주역이다.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기 때문일까. 해방 후 교단의 존재조차 희미해져 버렸다. 그럼에도 대종교가 한국독립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맨 위에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 만주와 연해주,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다
1919년 3월의 만세운동은 독립의 희망을 심어주었다. 맨손으로 나라를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려 주었다. 독립지사들이 가족과 생이별하는 고통을 감내하며 만주와 상해로 몰려들었다. 만주로 망명한 지사들은 장기전을 생각하며 농장을 세우고 학교를 설립했다. 서간도에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사관학교였다. 이 학교의 설립자는 영석 이석영(남양주)이다. 선생은 부친에게 물려받은 엄청난 재산을 신흥무관학교에 쏟아 부었다. 두 아들마저 잃고 굶주리다 중국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까, 선생의 이름을 아는 이는 여전히 드물다. 여준과 윤기섭은 이석영 6형제가 세운 신흥무관학교를 운영하며 3천 명에 이르는 독립군을 양성한 주역이다. 만주벌의 호장군 노은 김규식(구리)과 한국독립군 참모장 강재 신숙(가평)의 활약은 눈부셨으나 지금은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용인이 낳은 북만주 독립군의 최고 지도자 김혁 장군과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오광선 장군도 마땅히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권총과 폭탄으로 일제와 맞섰던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그리고 아나키스트조직인 남화한인연맹도 기억해야 할 조직이다. 오랫동안 아나키스트라는 사실 때문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10대 소년 시절부터 독립투쟁에 나선 이재현(안양)과 제2의 윤봉길 의사가 되고자 폭탄 거사를 준비했던 원심창(평택)도 새롭게 조명해야 할 분들이다. 안중근 의사보다 먼저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원태우 의사(안양)의 의거도 마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45년 7월, 조선총독부가 코앞인 경성 부민관에 시한폭탄이 터졌다. 발악하는 일제와 친일매국노들에게 가한 통쾌한 일격이었다. 20대 청년 류만수(안성)와 조문기(화성)가 주도한 부민관 폭파사건은 일제의 폭압에도 조선의 청년들이 살아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같은 시기 몽양 여운형(양주)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지사들이 은밀하고 조용하게 위대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해방 직후에 전국에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감옥에 갇혀 있던 민세 안재홍(평택)을 비롯한 독립투사들도 광복의 그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해외에서도 광복과 그 이후를 준비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부장 조소앙(파주)과 내무부장 신익희(광주), 그리고 외교운동에 헌신했던 박찬익(파주), 의회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윤기섭(파주)과 임정의 살림을 맡았던 엄항섭(여주) 같은 지사들도 광복 이후를 준비하고 있었다.

■ 함께 꾸어야 할 꿈
화성과 함께 안성은 3·1운동의 불꽃이 가장 뜨겁게 타올랐던 고장이다. 일제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재판정에서 ‘폭동’으로 규정한 세 도시의 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곳이 안성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현실이 숨어 있다. 만세운동의 현장에서 일본 헌병이 쏜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순국한 것으로 확인되는 희생자 중에서 아직까지 국가유공자로 서훈을 받지 못한 분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복된 지 74년이 흘렀다. 이 긴 세월 동안 대한민국 정부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현재까지 이를 방치했다는 것은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부끄러운 일이다. 국가 보훈처와 해당 지자체의 분발을 촉구한다.

올 한해 3·1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중에서 가장 반가웠던 소식도 들려왔다. 그중 하나. 남양주시가 일제의 만행과 이에 맞선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설립한 역사체험관의 이름을 ‘이석영 광장’으로 결정했다는 소식이다. 영석 이석영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1910년 12월, 형제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면서 화도읍 일대 토지를 모두 팔아 항일무장투쟁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운영하는 일에 전 재산과 일생을 바쳤다. 반상을 따지던 조선의 양반들도 임진왜란 때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 의기 논개를 기념하는 사당을 세웠다. 김향화와 이선경을 비롯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기념하는 공간 설립에 경기도가 앞장서면 좋겠다.

해외에서 투쟁하던 독립운동가들은 해마다 8월 29일과 3월 1일을 기념했다. 국치일을 기념하면서 왜 나라를 빼앗겼는가를 성찰하고, 3·1운동을 통해 발견한 독립의 열망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우리 한반도를 둘러싼 조건과 환경은 100년 전과 얼마나 다른가.

겨울이 시작되었다. 찬란한 봄을 맞이하기 위해 추위를 견디며 스스로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100년 전 한마음으로 만세를 불렀던 민중들의 염원은 온전한 독립이었다. 분열과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실을 떨쳐버리고 화합하고 상생하는 통일된 조국을 꿈을 꾸어야 할 때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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