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어주는 남자] 해동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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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 무렵

                    - 김사인

노루목 지나 심학산 넘어가면
조강나루
겨우내 맨살로 버틴 교각 사이를
허옇게 쳐내려오는
얼음조각들
전봉준처럼 도도하게 머리를 세우고
그 우에 올라앉아
죽기 아니면 살기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까맣게 떠내려가는
청둥오리떼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생명은 움직인다. 부딪히고, 폭발하고, 쇄도하며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생명의 이런 움직임을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은 ‘엘랑비탈’(e’lanvital)이라 했다. 그것은 창조와 진화를 이끈 동력이며, 죽음까지 극복해내는 숭고의 힘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안에 내재한 엘랑비탈을 폭발시켜 삶을 끊임없이 재창조해냈기 때문이다. 생명들의 이런 소란이 곧 숭고함일진대, 요즘엔 그런 소란의 역동을 보기가 어렵다. 위축되고, 작아지고, 소심해진 일상이 삶 전부가 된듯하다. 엘랑비탈이라는 열정을 터뜨리기보다 안락한 생활을 위해 엘랑비탈의 뇌관을 스스로 제거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인 것처럼 보여 씁쓸하다. 초등학생들의 장래 꿈이 건물주나 공무원이라는 충격적 기사를 읽고 나니 그 씁쓸함의 우려가 더없이 깊어지기만 한다.

시가 삶의 모든 것을 구원해줄 수는 없지만 뜨거운 위안과 든든한 힘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김사인 시인의 시 ?해동 무렵?을 읽으며 나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까맣게 떠내려가는/청둥오리떼”로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안과 힘을 얻는다. 해동 무렵 상류로부터 “허옇게 처내려오는/얼음조각들”의 모습은 그 자체가 장엄의 진풍경이다. 그 장엄에 몸을 얹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떠내려가는 청둥오리떼의 치열한 모습에서 서울로 압송되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도도한 모습을 연상해내는 시인의 통찰이 그저 놀랍다. 아는 만큼 보고, 경험한 만큼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삶이라면, 시인의 저 통찰은 엘랑비탈의 삶에 대한 지극한 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조강나루의 교각 사이를 넘실대며 흘러가는 얼음조각들과 청둥오리떼는 결국엔 바다에 이를 것이다. 그 바다가 삶의 숭고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우리들의 삶은 필히 ‘전봉준처럼’ 되어야만 할 것이다.

도도한 자세로, 형형한 눈빛으로, 죽기 아니면 살기의 결기로 격렬히 흘러가는 삶, 그것이 바로 엘랑비탈의 시간이다. 시인이 말하는 해동(解凍) 무렵은 자기 삶의 긍지와 꿈을 녹여 새로운 곳으로 이끌어가는 재창조와 도약의 시간일 것이다. 흘러가고 도약하는 자들만이 바다에 이를 것이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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