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6·25 전쟁 70년, 아직도 평화의 길은 멀어
[기고] 6·25 전쟁 70년, 아직도 평화의 길은 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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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6ㆍ25 참전용사이셨다. 아버지는 1948년 4월 국군에 자원입대하셨다. 지금은 북한 땅이지만 당시에는 우리 땅이었던 개성 송악산에 주둔하고 있는 국군 제1사단 11연대가 아버지의 근무지였다. 11연대는 1950년 4월 서울 수색으로 부대를 옮겼는데 부대를 옮긴지 두 달 만에 6ㆍ25 전쟁이 일어났다. 6월25일 새벽,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자 11연대는 즉각 임진강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군과 백병전을 벌였다. 그러나 우리군은 북한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남으로 후퇴했다. 아버지가 소속된 부대는 1951년 12월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북진에 나서 연천 고랑포지구에서 북한군과 또 맞서 싸웠다고 한다. 그렇지만 2배가 넘는 북한군의 화력과 병력에 당할 길이 없어 다시 후퇴했다. 아버지는 추운 겨울 임진강과 맞닿는 한강하구 김포의 빈 헛간에서 볏짚을 깔고 다친 몸을 추스렸다고 한다. 그렇게 목숨을 건진 아버지는 통일만은 내 손으로 이루겠다는 충정(忠情)으로 1952년 4월 군부대를 찾아 자진 입대했다. 다시 북한군과 치열하게 싸우다 1956년 12월5일 전역하셨다. 이후 평생을 전쟁의 악몽으로 잠을 못 이루셨다. 특히 날씨가 흐리거나 추운 겨울에는 허리를 못 쓰시고 힘들어 하셨다. 아버지는 결국 통일을 보지 못하시고 지난 2015년 90세의 나이로 영명하시고 국립호국원에 안장되셨다.

6ㆍ25 전쟁은 이 땅에서 다시는 있어서 안 될 전쟁이다. 3년1개월간의 전쟁으로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 약 450만명에 달했다.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 200만명, 북한은 250만명에 이르렀다. 군인 전사자는 한국군이 22만7천748명, 미군이 3만3천629명, UN군이 3천194명이며, 북한군은 54만명, 중공군은 90만명이다. 남한은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됐다. 북한은 피해가 더 심해 전력의 74%, 공업시설의 80% 이상이 피해를 입었다. 6ㆍ25 전쟁은 남북에 엄청난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혔고 아직도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1953년 정전 이후에도 북한의 침략행위는 지속됐다. 1968년 청와대 및 울진ㆍ삼척 무장공비 침투, 1974년 휴전선 남침용 땅굴 발견,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1987년 대한항공기 폭파, 1996년 강릉 무장공비침투, 2002년 연평해전, 2010년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2006년부터 계속되는 핵실험도 있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대북 햇볕정책, 포용정책, 유화정책을 기조로 많은 것을 인내하며 남북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2018년에는 남북한 정상이 ‘판문점 선언’에서 평화협정으로의 전환과 한반도에 비핵화를 실현하기로 선언하며 평화가 오는 듯 했다.

그런데 지난 16일 북한이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더 나아가 금강산 지역에 장사정포를 포함한 군부대 배치, 휴전선 인근 군사훈련 재개, 철거한 휴전선 GP 재설치, 대남 삐라 살포 등 군사조치를 강행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아연실색(啞然失色). 북한의 철없는 행위는 도를 넘어 무례하고 지나친 것 같다. 동족상잔의 끔찍한 비극이 다시 일어날까 불안하다. 올해는 6ㆍ25 전쟁 발발 70년을 맞는 해이지만 평화통일의 길은 더 멀게만 느껴진다. 한반도에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 발생하지 않도록 방위태세 강화와 안보의식을 확고히 해야겠다. 70년 전 고귀한 생명을 받쳐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한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며 아버지께서 평생 바라던 조국의 평화통일이 꼭 이뤄지기를 소원한다.

문제열 국립한경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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