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이춘재 “‘올 것이 왔구나’하고 생각했다”...이 담담한 살인범에게 정의는 무엇인가
[사설] 이춘재 “‘올 것이 왔구나’하고 생각했다”...이 담담한 살인범에게 정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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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연쇄 살인범은 노회한 수감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났다. 2일 열린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연쇄살인자 이춘재다. 1980년대 화성과 청주 지역에서 벌어진 14건의 살인 사건에 대해 ‘내가 진범’이라고 증언했다. 이날 재판은 이춘재 8차 사건의 재심 및 9차 공판이었다. 당초 지목된 범인은 윤성여씨(53)로 그의 무고함을 밝히는 과정이다. 이춘재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모든 범행을 자백했다. 34년만에 자백이다.

재판정 이춘재의 모습은 그저 그런 수감자였다. 청록색 수의에 하얀색 운동화를 신고 마스크를 쓴 채 입정했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 흰머리가 곳곳에 성성했다. 얼굴에도 주름이 깊게 패어 50대 중반의 나이를 실감케 했다. 증인 선서를 했다. 이어 경찰 재수사가 시작된 뒤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들과 어머니 등 가족이 생각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모든 것이 다 스치듯 지나갔다”고 밝혔다.

이춘재의 이날 진술은 진솔해 보였다. 그 모습이 차라리 처연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살인자다. 죄 없는 부녀자 14명을 극악무도하게 살해한 살인마다. 마치 세상을 초연한 듯 이어가는 그의 답변 모습에서 정의를 생각하게 된다. 14건 모두가 공소시효를 지났다.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 그를 단죄할 인간의 수단은 없다. 적어도 그는 이런 인간의 법체계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법은 과연 정의로운 것인가.

많은 국민이 그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허가되지 않았다. 법률상 그는 증인이다. 본인의 의사에 반해 촬영되지 않을 권리를 가졌다. 재판부가 이를 근거로 촬영을 막았다. 자연인 이춘재의 초상권이다. 재판정에는 윤씨가 앉아 있었다. 억울하게 20여년을 복역한 희생자다. 과거 그에겐 초상권도 없었다. 짐승처럼 끌려다니며 사진이 찍혔다. 그가 이춘재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윤씨 인생에서 정의는 있기나 했나.

공소시효가 보호하는 그의 권리를 탓하진 않겠다. 하지만, 초상권까지 보호하는 배려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가 복역 중인 죄명 또한 흉포한 살인이다. 형이 확정돼 복역 중이다. 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공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자백이 모든 진실이라는 보장도 없다. 그의 얼굴 공개로 드러날 혹시 모를 진실도 있을 수 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공개해야 한다. 이춘재 사건에서 정의는 34년간 한 번도 증명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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