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회암사지 문화적가치 고찰] 고려말~조선초 최대 왕실사찰 유적
[양주 회암사지 문화적가치 고찰] 고려말~조선초 최대 왕실사찰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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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선종사원의 전형 양주 회암사지

양주 회암사지는 한국에서 가장 잘 보존된 절터이다.
이 절은 고려말 조선초의 불교계를 이끄는 구심점이자, 조선 역대 왕의 위패를 봉안했던 대표적인 왕실원당이었다.
하지만 양란 이후 쇠퇴를 거듭하던 회암사는 서서히 허물어져 오늘날 대부분의 사역(寺域)이 폐사지로 남아있다.
회암사지는 1997년대부터 2015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12차례의 발굴조사와 유적정비, 박물관 건립 등 종합정비사업을 통해 13~14세기 동아시아 선종사원의 전형이자 고려말 조선전기 최대의 왕실사찰 유적임이 증명됐다.
회암사지는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이에 회암사지가 지닌 역사적 의미와 폐사지 복원의 문화적 가치를 고찰한다.

고려에 남긴 인도 승려의 날카로운 추억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보다 명확한 사실을 알려줄 때가 있다. 와인 향기가 포도나무 뿌리의 깊이를 알려주고, 현악기 선율이 연주자가 지닌 영혼의 빛을 전해주듯, 수백ㆍ수천년 전 무너져버린 유적들은 역사서에서 말해주지 않는 숨겨진 진실을 전해주곤 한다.
오래전 지어졌다 폐허처럼 남아있는 빈 절터들은 건물이 빼곡히 들어선 사찰보다 더 깊고 은밀한 이야기를 말해준다. 어지러이 널려 있는 돌의 문양들은 이곳이 1천여년 전 사찰이었음을, 지난 수백년간 그 누구도 살지 않았음을, 수차례 건물이 지어지고 무너지기를 반복했음을, 한때 이곳에 머물던 수많은 납자(衲子:절에서 살면서 불도를 닦고 실천하며 포교하는 사람)들이 한국의 수행 전통을 이끌어 왔음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절터에 갈 때면 깊은 영감과
회한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곤 한다. 고려와 조선의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폐사지 중 한곳인 양주 회암사지. 한때 고려와 조선의 가장 융성한 사찰이었으나 언제부턴가 1명의 승려도 거주하지 않게 된, 그럼에도 절터의 윤곽은 그 어느 곳보다 잘 남아있는 곳. 고려에서 조선으로 건너오는 격변기에도 사세를 유지했지만, 결국 숭유억불시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스스로 허물어진 사찰이다. 그 어느 곳보다 찬란했기에 그 어느 곳보다 더 황량하게 남아있는 회암사지의 기나긴 이야기가 역사 전면에 등장하게 된 건 700여년 전 고려를 방문했던 한 인도의 승려로부터 시작된다.

달마로 추앙된 인도 마갈타국의 왕자
1326년(충숙왕 13년) 지공이라는 이름의 선승(禪僧)이 고려를 방문했다. 검은 얼굴을 지닌 낯선 이방인 승려는 고려인들로부터 열광에 가까운 환영을 받았다. 누군가는 그를 일컬어 석가모니의 환생이라 했고, 누군가는 달마가 고려를 찾았다며 환호했다.
인도 마갈타왕국에서 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나란타사원에서 출가한 후 남인도 길상산에서 보명(普明)의 법을 이었고, 서천(西天) 제108조가 됐다.
이후 인도의 남부와 서부, 북부 등지의 여러 나라와 티베트를 거쳐 1324년 원제국에 이르렀다.
석가족의 후예인 마갈타국 왕자가 출가해 선불교를 계승한 서천 108대의 조사가 됐고, 수만리 험난한 길을 거치면서 외도들을 굴복시키고 이교도들을 교화시켜 수많은 신도가 생겨났다는 풍문은 원의 수도 연경에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326년 지공은 어향사(御香使)로서 고려를 방문했다. 그가 아시아의 맨 동쪽 고려까지 찾아온 이유는 법기보살(담무갈보살)이 상주한다고 전해지는 신비로운 산, 금강산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담무갈보살 친견 위해 고려 방문
14세기 원제국은 물론 고려와 일본에선 보살의 주석처로 전해지는 산을 순례하는 게 하나의 신앙처럼 유행했다. 그런데 오대산, 보타산, 용문산, 아미산 등 보살 상주처가 대부분 중국에 있는 것과 달리 금강산은 고려에 있는 불교 성지로 꼽혔다. 화엄경 제보살주처품에는 ‘동북방의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으니, 담무갈보살이 1만2천의 보살들과 더불어 항상 반야심경을 설법하는 곳’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중국인들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동북쪽의 담무갈보살 상주처를 고려의 금강산이라고 믿었다.
13세기 중국에선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을 꼭 한번 가보고 싶다(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는 말이 속담으로 전해질 정도로 금강산 순례는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소망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 온 사신들은 금강산 순례를 조정에 요청했고, 원과 명의 황제들은 사신에게 번과 기를 내려 금강산 사찰에 봉안하라는 명을 내리곤 했다. 원의 수도 연경에서 이 전설을 전해 들은 지공도 금강산에서 담무갈 보살을 친견하고자 고려로 건너오게 된 것이었다. 지공은 고려의 수도 개경에 도착했고 곧바로 금강산의 법기도량, 예천 대곡사, 전주 화엄사, 광주 무등산 등지를 방문했다. 지공은 개경으로 돌아가기 직전 양주 땅을 거치던 길에 회암사를 들르게 됐다.

양주에서 만난 나란타의 모습
회암사가 들어선 천보산 기슭을 바라본 지공은 이곳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3개의 산과 2개의 강물이 만나는 지형에 둘러싸인 회암사에서 그는 자신이 젊은 시절 수학했던 나란타 사원의 모습을 읽었던 것이다.
지공이 방문했을 당시의 회암사 모습은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1174년(명종 4년) 원경국사(元敬國師)의 친필을 보기 위해 금의 사신이 왔다는 것이나, 1304년 원의 승려 철산소경(鐵山紹瓊)이 회암사에 들러 서액을 했다는 기록들이 간간이 전해진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회암사는 고려 불교계에서 크게 비중이 있는 사찰이 아니었고, 이 절의 문도나 건축물 등이 언급될 정도로 유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회암사 모습을 추정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지공에게 있어 회암사는 고려에서 가장 큰 여운을 남긴 사찰임에 분명했다. 이때 지공이 받은 강렬한 인상은 훗날 그의 제자 나옹혜근에게 ‘삼산양수지간(三山兩水之間)에 고려의 나란타를 세우라’는 수기를 남긴 계기가 됐다.

글ㆍ사진_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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