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전도사로 거듭난 코미디언 이순주
<사람들> 전도사로 거듭난 코미디언 이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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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내가 쓰일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죠. 재산도, 명성도 다 잃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온 국민이 가난을 떨쳐버리기 위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힘겹게 살아야 했던 지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최초의 여성 MC이자 코미디언으로 맹활약하며 웃음을 선사했던 이순주(65)씨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전도사로 새 삶을 펼치고 있다.

현재 코리아타운내 미주기독교방송(AM 1650KHZ)에서 방송위원으로 재직하며 오전 8시 뉴스와 10시의 생방송 토크쇼 `아름다운 만남', 오후 3시의 대담 및 시사프로 `오후의 데이트'를 진행하고 있는 이씨는 수시로 간증을 다니며 좌절의 끝에서 거듭난 삶을 풀어놓고 있다.

서라벌예대 1학년 재학중 제일소녀가극단 단원 50명을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응시해 뽑혔으나 6개월만에 흥행 실패로 가극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숨겨진 `끼'를 발견한 이씨는 이후 송해-박시명,구봉서-후라이보이,서영춘-백금녀,명진-박응수 등 코미디언들이 콤비를 이뤄 활동하던 극장 쇼무대를 쫓아다녔고 가끔 대역으로 출연하면서도 그들의 대사를 그대로 재연, `똑순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던중 1968년 월남 공연은 그의 인생을 스타덤에 올려놓는 계기가 됐다. 사회를 보면서 노래와 무용, 코미디를 선보이자 군인 팬들이 뜨기 시작했고 1970년 시민회관에서 열린 아시아가요제 때 함께 사회를 보기로 했던 배삼룡씨가 앓아누으면서 혼자 가요제를 진행, 첫 여성 MC로 기록됐다.

당시 가요제를 지켜보던 TBC방송의 김경태 위원은 이씨를 발탁, 라디오 프로그램인 `웃음의 파노라마'를 신설했고 이씨는 송해씨와 호흡을 맞춰 단숨에 인기를 독차지했으며 이후 8년간 방송된 `싱글 벙글쇼'를 비롯 `웃으면 복이 와요' `유머 극장' `유머 1번지' 등 거의 모든 공개방송 프로에 출연해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높아가는 인기 만큼 연평균 3차례 입원해야 할 정도로 위장병은 깊어졌고 1978년에는 1년간 절에서 요양하기도 했다. 연예계를 떠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이씨는 1980년 미국공연팀에 합류, 미국을 방문하면서 그대로 눌러앉았고 1981년에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한동안 몸과 마음이 편안했으나 몸속에 꿈틀대던 `끼'는 그를 다시 한국으로 내몰았다. 1985년 KBS 라디오에서 `LA에서 온 이여사'라는 프로그램을 맡았고 이후 출국과 재입국을 반복하다 1991년 아예 미국 영주권을 포기하고 한국에서 여러 사업을 시작하다 결국 부도가 나며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도피 과정에서 여동생의 권유로 교회를 찾았다가 기독교인이 된 그는 우여곡절끝에 1994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정착, 나이트클럽을 열었지만 얼마 가지않아 쫄딱 망했고 절망의 바닥에서 종교적 구원으로 새로운 빛을 발견했다.

1995년 애틀랜타신학대에 입학, 2년을 수료한 그는 다시 4년제인 임마누엘신학대를 다닌 그는 마침내 과거의 영욕을 모두 털어낼 수 있었고 전도사로서 새출발한뒤 올 2월 LA로 자리를 옮겼다.

오전 6시30분 방송국에 출근해 퇴근할 때까지 하루 평균 12시간씩 근무하고 있는 이씨는 3차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질곡의 삶에서 얻은 지혜를 구수한 언변으로 풀어놓아 청취자들의 반응은 뜨겁기 만하다.

그 누구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밑바닥 인생까지 경험했기에 더 이상 좌절할 게 없다는 이씨는 "나를 쓰고자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갈 것"이라며 "하느님 앞에서 교만을 떨칠 수 있었기에 행복을 되찾았으며 이달 말에는 버지니아주에서 간증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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