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흘려보낸 임진강… ‘희망의 바람’이 분다
아픔을 흘려보낸 임진강… ‘희망의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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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걸어서 만나는 임진각
문화관광체육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임진각관광지를 찾은 관광객은 500만명이 넘었고, 이 가운데 45만명이 외국인이었다고 한다. DMZ 일대 관광객도 44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DMZ가 얼마나 관심이 높은 곳인지를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보여주는 충분한 근거라 할 수 있다.

무엇이 수많은 사람들을 임진강과 DMZ(글에서는 DMZ와 임진강을 통용하여 사용한다. 경기도에서 이 둘은 같은 공간을 구성한다)로 불러들이는 것일까. 사람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만나며, 무엇을 가져가는가? 또 DMZ란 실체에 얼마나 접근하고 있는가?

임진각 건물 옥상에는 강을 건너 북녘을 바라보는 전망대가 마련돼 있다. 임진각을 찾을 때면 간혹 겪는 일이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강 저편을 북한으로 이해한다. 엄연히 경의선 열차가 강을 건너고, 군용차며 논을 오가는 화물차가 눈에 익은 모습이지만 착각은 쉽게 교정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전망대는 뭐냐는 표정이다. 호기심 많은 관광객의 눈으로 DMZ를 바라본다는 것은 때로 이렇게 허술하고 빈약한 것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임진각을 처음 찾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최근 통일과 안보라는 기존의 관점을 넘어 비무장지대 일대가 생태와 평화라는 새로운 가치로 조명되면서 더 많은 사람, 더 구체적인 관심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군대가 출입관리에 신경 쓸 만큼 민간인 통제구역을 드나드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러나 이들 역시 온전히 DMZ를 만나지는 못한다. 이곳은 여전히 불편해서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잠시 다녀갈 뿐 머물 수 없고 또 머물려 하지도 않는다.

누구는 역사를 찾아 반구정과 숭의전을 찾고, 누구는 생명을 좇아 독수리 월동지와 두루미 서식지를 오가고, 고구려성이나 전쟁유적을 따라 다니기도 하지만 이 역시 하나의 지점일 뿐이다. 온전한 DMZ, 임진강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임진강 유역이 예로부터 전쟁이 많았던 것은 기록으로 확인된다. 칠중성과 호로고루성에서 신라와 고구려는 크게 부딪쳤다. 역사는 성 주변 주민들의 불안을 기록했지만 그 뒤 임진강 남과 북의 두 고을 사람들에게 어떤 갈등이나 감정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임진강을 사이로 삼팔선이 지나며 나뉘었던 적성사람과 백학사람, 그들이 분단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대결은 잠깐이고 그 뒤로는 평범한 삶이 이어진다. 총탄이 날아다니는 속에서도 사람들은 농사를 지었다. 날카로운 상처를 강물은 아무렇지 않게 지우고 묵묵히 흘러간다.

고려가 세워지고 전쟁이 끝나자 임진강 장단나루 사람들은 장단곡을 지어 불렀다. 고려의 창업을 찬양했다는 이 노래는 위험했던 변방이 왕도의 길목이 되면서 누리게 된 태평성대의 기운을 반영한다.

지금은 가사가 전하지 않지만 이 노래는 조선 초까지 꽤나 유행했던 모양이다. 조선을 개국한 정도전이 장단나루를 지나며 장단곡을 듣게된다. 새 나라가 세워졌음에도 고려왕을 칭송하는 노래를 들은 정도전은 안타까운 마음을 시로 남겼다. 나라가 바뀐 것도 모르고 태평성대만을 노래하는 것, 이것이 삶이고 더 오래고 끈질긴 역사가 아니던가.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다양한 시각의 접근이 시도되는 것은 분명 DMZ, 임진강을 풍요롭게 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전쟁과 분단, 임진각과 판문점에서 비롯되는 DMZ에 대한 단선적인 인식을 크게 넓혀 줄 것이다.

다양한 접근 가운데 하나의 시도로 임진강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 3월의 어느 주말에 이들 모임을 따라가 보았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파주 장파리 임진강 적벽길을 걸었다.

임진강 걷기는 장파2리 마을회관에서 시작됐다. 안개비가 스치는 축축한 날씨였지만 그런대로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미군 주둔 시절의 흔적인 장파중학교 건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 현재는 창고로 쓰이고 있는 건물을 주민들은 재건중학교로 부른다.

장파리는 임진강의 범람이 만들어 낸 자연제방 위 긴 마루턱에 형성된 마을이다. 긴 등마루를 따라 형성된 마을이어서 장마루라고 부른다. 전쟁 전 이곳은 단지 20여 호의 집이 있었을 뿐이다. 긴등마루로는 도로가 나 있어서 일제강점기에는 서울에서 문산을 거쳐 고랑포, 개성을 오가는 길목이었지만 정작 장파리가 유명해 진 것은 1960년대 미군이 주둔하면서부터였다.

길을 사이로 마주보고 늘어선 건물들은 장파리가 농촌마을이라기 보다는 상점을 중심으로 형성된 번화한 마을임을 보여준다. 미군 주둔 시절의 풍경은 사라지고 상점 간판은 모두 현대식으로 탈바꿈했다.

걷는 도중에 주민의 도움으로 조용필이 무명시절 노래했다는 미군클럽 ‘라스트찬스’ 건물을 둘러볼 수 있었다. 클럽 안은 이집트풍의 벽화가 그려져 있고, 중앙무대와 출연자 대기실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홀 한쪽의 한 평 남짓 쪽방에는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들이 있었다고 한다.















블루문, 럭키, 오아시스 등의 클럽이 더 있었고 라스트찬스가 백인 클럽인 반면에 블루문은 흑인클럽이었다고 한다. 건물의 보존에 대해 묻자 주민은 ‘뭐 좋은 곳이라고 그러느냐’면서도 예전의 향수를 살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는 반응이다.

클럽이 흥성거리던 당시 이곳에서 외출이나 휴가를 보내던 미군들은 임진강 리비교를 건너 복무지로 돌아갔다.

필자도 그 길을 따라 걷는다. 리비교는 한국군 관리로 전환된 뒤 북진교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여전히 리비교로 통용된다. 임진강 현무암 절벽을 걷도록 설치된 적벽길은 리비교 앞에서 시작해 37번 도로와 임진강 사이로 길게 이어져 있다.

주변 풍경은 안개에 가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로를 걷고 흙길을 걷고. 길은 눌노천이 강으로 들어오는 소개까지 이어진다. 소개는 조선시대 성리학자 성혼 선생이 머물던 자락이다. 금파리 성터와 함께 고려건국과 멸망의 전설이 전하는 곳이기도 하다.

미군들이 떠나고 퇴락할 것 같던 장파리는 그러나 여느 농촌과 달리 여전히 마을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장파리 마을이 커진 데에는 단지 미군의 주둔만이 아닌 또 다른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민의 상당수가 바로 실향민들이라는 점이다.

고향을 보고도 못 가는 강 건너 장단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아침에 강을 건넜다가 해가 떨어지면 돌아오는 출입영농이란 방식의 농사를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전쟁과 실향, 군대와 민통선 규제는 임진강 유역을 사는 사람들의 삶을 강하게 규정하고 있다. 마을들은 과거의 흔적을 지우고 새롭게 탈바꿈하려고 하지만 어디까지를 지우고 무엇을 남겨둘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다.


복잡한 고민은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 알 수 없는 풍경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꽉 막혔던 임진강에도 변화의 바람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변화에 대한 이러저러한 의견이 분분한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 결론이 무엇이든 임진강의 미래는 바라보는 자의 것이 아니라 강에 머무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재석 파주지역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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