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십자군···노병은 18세 였다
자유의 십자군···노병은 18세 였다
  • 윤철원 기자 ycw@ekgib.com
  • 입력   2011. 01. 03   오후 2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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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UN군 참전비 순례 <5>호주전투기념비

60년전 동양의 손바닥만한 반도가 전쟁의 포화속에 휩싸이자, 곧바로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을 자처한 나라가 있었다. 바로 태평양 건너 8천여㎞나 떨어져 있는 나라, 호주다.

호주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결의하자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참전을 결정했다. 이름도 낯선 나라에서 갓 스물 어린 나이에 사선을 넘나들었던 호주 참전 병사들. 총탄과 포성이 빗발치던 전쟁터에서 동료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그들이 지난 6월25일 한국땅을 다시 밟았다.

이날 가평군 북면 목동리의 북배산 입구. 강렬한 태양아래 우뚝 서 있는 ‘호주전투기념비’ 앞에 4명의 노병이 섰다. 어느새 백발이 성성해진 노병들은 거수 경례로 먼저 떠나간 전우들의 넋을 추모했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호주의 젊은 용사 8천407명. 이들 중 339명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야만 했다.

호주군이 벌인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가평전투’. 수십배에 달하는 인해전술로 밀고 올라오는 중공군을 막아내며 ‘가평대대’라는 칭호까지 얻었지만 네 노병은 이곳 가평에서 수많은 동료를 잃었다.

의무병으로 참전했던 존 더슨씨(78)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옷을 벗긴 후 붕대를 감고, 몰핀 주사를 놓아주는 게 전부였다”고 당시의 참혹함을 전했다.

이유도 모른 채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야 했던 어린 병사들은 60년이 지난 후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이유를 찾았다.

존 넌로씨(76)는 “전쟁 당시 이곳은 허허벌판에 공포로 가득했다”며 “지금은 환상적으로 변해 못 알아볼 정도”라고 참전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냈다.

지금의 ‘호주전투기념비’는 1963년 4월24일 유엔한국참전국협회와 가평군민이 세웠던 기념비가 있던 자리에, 지난 1983년 12월27일 가평군이 재건립한 것이다. 기념비는 1m 정도의 기단 위에, 5m 정도의 높이로 5개의 사각형 모양의 돌이 이어 붙여져 있다.

비석 오른쪽에는 전투현황도를 새긴 동판이 있고, 왼쪽에는 자연석 위의 동판에 참전 약사가 기록돼 있다. 비 전문에는 상단에 그려진 캥거루가 호주를 상징하며, 기단 위에 우뚝 솟은 비의 모습은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의 기상을 뜻한다고 적고 있다.

호주의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조치는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됐다. 호주는 전쟁 발발 4일 만에 해군 바탄호를 유엔군 휘하에 배속시켰고, 공군 77비행중대를 곧바로 전쟁에 투입했다. 일본 점령군으로 배치됐던 호주 육군 3대대는 영연방 27여단에 배속돼 1950년 9월2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호주군은 사리원 전투에서 적극적인 백병전을 벌여 후퇴 중인 북한군을 격멸함으로써 작전속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는 한편 이후 영유리 전투, 박천 전투, 가평 전투, 마량산 전투 등에서도 뛰어난 전투능력을 과시했다

가평군은 매년 4월 마지막주 이곳에서 호주 참전 용사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호주정부 역시 지난해 7월 시드니 무어파크에 참전기념비를 세우고 참전 용사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또 호주에는 ‘가평거리’가 있을 정도로 호주인들에게 가평은 애틋한 곳이다. 
 

<가평전투>
1951년 4월, 중공군은 춘계 대공세를 펼치며 파죽지세로 남하를 거듭한다. 특히 한국군 6사단을 격파한 중공군 118사단은 23일과 24일 이틀 동안 비교적 기동이 용이한 가평천 골짜기를 통해 서울-춘천간 도로를 차단함으로써 연합군의 전선을 갈라놓으려 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가평 북방 8km 지점의 목동리 504고지에 배치된 호주 3대대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혼비백산해 후퇴한다. 4월23일 밤 10시경, 6사단을 추격하던 중공군 118사단 선두 연대는 가평을 신속히 점령할 목적으로 종대 대형을 유지한 채 도로와 계곡을 따라 진격하던 중 호주군의 기습공격을 받는다. 호주 3대대가 배치된 사정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일단 후퇴한 중공군은 이튿날인 24일 새벽 1시경 연합군 전차부대가 재보급을 위해 잠시 철수하자 즉시 반격을 가한다. 그후 3대대와 중공군의 일진일퇴 공방은 24일 아침녘까지 이어졌다. 날이 밝아 연합군의 항공폭격과 포병사격이 집중되자 중공군은 산더미 같은 시체를 남기고 급히 철수한다.

호주군 1개 대대가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던 중공군 1개 사단을 이틀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물리치는, 믿기 어려운 전과를 올린 것이다.

이 전투에서 호주군은 32명이 사망하고, 3명이 실종되는 피해를 입었다. 한국전쟁 3년 동안 숨진 호주군 가운데 10분의 1이 이 전투에서 희생된 것이다. 하지만 중공군은 무려 1만여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로써 중공군의 연합군 전선 분할 기도는 저지됐고, 연합군은 북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됐다.

3대대는 그 공로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받았고 ‘가평대대’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호주 육군은 가히 기적이라고 할 만한 가평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4월24일을 ‘가평의 날’로 정했으며, 가평 퍼레이드 같은 행사를 통해 호주 군인의 용맹스런 정신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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