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과 사람, 京畿를 세우다]33. 천보산과 회암사(檜巖寺)의 국사 무학대사
[山과 사람, 京畿를 세우다]33. 천보산과 회암사(檜巖寺)의 국사 무학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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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찰' 위용 자랑했던 회암사, 무학대사의 영험함 미치나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

인생은 한줌 잡을 수 없는 구름과도 같다. 한 잔 술에도 큰 도(道)를 통할 수 있고, 억만년의 공력을 들인 노력에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이리라.

위의 시는 깨달음을 얻고자 평생을 수행했던 한 승려의 노래이다. 그 승려는 한 때 공민왕의 스승으로, 또한 온 백성의 스승으로 사자후를 터뜨렸지만 덧없는 인생으로 인해 한강 나루에서 배를 타야했고, 여주의 신륵사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바로 나옹화상이다. 보제존자 나옹혜근이라 해야 맞을 나옹화상이 머물다 떠난 곳이 바로 양주 회암사다.

경기도 양주와 포천을 가로질러 울창한 소나무와 바위로 뒤덮힌 천보산이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숨어든 어느 왕이 전쟁이 끝나고 궁궐로 되돌아간 뒤, 전쟁의 칼바람을 막아준 이 산을 금과 은으로 치장하라는 엄청난 명이 내리자, 고민하던 신하들이 꾀를 내어 이곳의 이름을 천보(天寶)산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천보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던 회암사의 옛 영화가 남아있다.

사람들은 지금도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사찰로 경주의 황룡사지나 익산의 미륵사지를 생각한다. 어마어마한 절터에 깜짝 놀라며 고대 사회에 불교의 위치가 어느 정도 되었는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회암사지에 오게 되면 황룡사나 미륵사지가 그리 넓은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발굴된 터만 1만여 평, 상상할 수 없는 크기이다. 지금이야 빈 들판에 건물들이 있었던 초석만이 남겨져 있지만 600여 년 전 이곳에서 수행했던 수 많은 승려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바라보는 것 자체가 장엄이다.

수백 년 동안 불경 소리가 끊일 날 없었고, 밤이면 법등(法燈)의 불빛으로 사바세계의 어둠을 밝혔을 회암사는 이제 옛 영화는 간데없고, 스산한 가을바람만이 감돌고 있다. 하지만 버려진 작은 돌멩이와 소나무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에도 무한한 감동을 회암사는 주고 있다. 눈을 감고 생각한다. 불법(佛法)의 진리가 과연 말과 언어에서 나오는 것일까?

회암사지에서 왼편 길로 군부대를 지나 한참을 올라가면 크지 않은 작은 절집이 나온다. 땀이 나고 다리가 지칠만 하면 회암사라고 써있는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과거의 회암사가 아니고 새로 지은 암자격이다. 하지만 이 곳에 너무도 훌륭한 분들의 체취가 남아있다. 경내의 오른편 작은 언덕에 지공화상과 나옹화상 그리고 무학대사의 부도와 부도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세분은 모두 고려 말 조선 초 온 나라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고승들이었다. 인도의 명문사원 아란타사를 거쳐 고려로 건너와 불교를 전했던 지공, 고려 말 큰 사찰을 중창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켰던 나옹, 조선 초 태조 이성계의 정신적 지주로 성리학으로 무장된 사대부들의 탄압속에서도 불교를 지켜나갔던 무학, 이 세 승려의 부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이 만큼 회암사는 우리 불교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곳이다.

회암사가 고려 말기에 나옹화상이 머물면서 국사의 사찰로 유명해졌지만 실제 더 유명하게 된 것은 바로 무학대사(無學大師)(1327 - 1405)가 이곳에서 수행을 하였기 때문이다. 돼지화상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못생긴 얼굴을 하였다는 설화도 있지만 그는 조선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와 서로 외모를 가지고 농담을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언제부터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태조의 꿈을 풀어주면서 왕이 될 운명이라고 이야기한 것이 두 사람이 급속도로 가까워진 것이라 볼 수 있다.

태조가 고려말에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면서 명성을 날리던 중 어느날 밤 닭이 우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이 너무도 신기해서 친구인 무학대사를 찾아가 꿈을 이야기했더니 무학대사가 큰 절을 하며 이제 왕이 되실것입니다라고 예언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인즉슨 닭이 ‘꼬끼오’하고 우는데 꼬는 한자로 고(高)이고 까는 한자로 귀(貴)이고 요는 한자로 위(位)라는 것이다. 이 세말을 합치면 ‘고귀위(高貴位); 인데 이는 높고 귀한 자리로 바로 임금을 뜻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한 것 이다. 태조는 이꿈을 통해 자신의 왕업을 생각하고 실천하였으며 마침내 역성혁명을 하여 조선을 건국하였다.

이처럼 새로운 국가 건설의 원동력을 제공해준 이가 무학대사였고, 그로 인하여 무학의 지위는 더욱 높아졌다. 무학은 단순히 국왕과 가까운 권승(權僧)이 아니었다. 그는 지공과 나옹의 뒤를 잇는 고려말 조선초기의 최고의 선승이었다. 풍수지리에도 해밝아 그가 서울 도성의 위치를 잡은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태조 이성계가 왕자의 난을 통해 어쩔 수 없이 국왕의 권력을 내려놓고 상왕이 되어 인생의 무상함을 느낄 때 그가 찾아가 곳이 바로 이곳 회암사였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고 자식들간의 권력을 다투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반성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태조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 위해 무학대사가 거처하는 회암사를 찾았고 이곳은 이때부터 사찰의 역할과 더불어 궁궐로서의 위치를 더하게 되었다. 이는 우리 역사상 매우 특수한 사례이다. 상왕 태조가 행차를 하면 회암사의 승군들이 호위를 하고 다닐 정도였다. 아마도 조선시대에 이런 사례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수원의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 사도세자의 원찰인 용주사의 승려들이 호위하였던 것일 뿐이다. 회암사는 억불숭유정책 시절에도 국찰로서의 위용을 한껏 자랑하면서 한강 북쪽의 경기도 양주 일대의 대표적 사찰로 자리매김하였다.

무학대사가 입적을 하고 나라에서 최고의 선물을 주었다. 바로 그의 사리를 봉안하는 사리탑인 부도를 최고의 공력을 들여서 만들어준 것이다. 무학대사의 흔적이 담긴 부도(浮屠)와 탑비는 회암사 왼쪽 산등성이에 있다.

천보산으로 올라가는 등산 코스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부도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신라시대의 양식을 이은 것으로 3단으로 쌓은 장대석(長大石)과 동자(童子)기둥에 도란대를 끼워 꾸민 팔각난간 안에 안치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팔각형을 기본으로 하면서 몸통만은 운용문(雲龍文)이 조각된 원형이다. 탑신은 큼직한 편이며, 구름속에 세마리의 용이 노니는 형상을 새긴 몸통부분이 매우 인상적이다.

지붕의 처마와 추녀는 위로 들려 있고, 지붕면의 굴곡이 매우 깊다. 추녀 끝에는 봉황머리가 새겨져 있으며, 안쪽에는 사자를 그려 넣었다. 상상의 동물인 용과 봉황 그리고 지혜의 상징인 사자까지 조각된 것이다. 그래서인가 양주 일대의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이 되거나 아니면 복을 기원할 때 이곳 회암사에 와서 무학대사의 부도에서 기도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아마도 영험함이 존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살아 생전의 무학대사의 신비한 힘이 죽어서까지도 영험을 미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지금 회암사는 부활하고 있다. 사실 회암사는 잊혀진 사찰이었다. 그저 역사 공부하는 전공자들만이 찾아가는 절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경기도에서 중건 사업의 하나로 회암사의 발굴과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이미 발굴은 상당히 진행되어 상당한 연구성과를 올렸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양주시에서 회암사지 박물관도 건립하였다.

필자는 자문위원으로 박물관 건립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복원은 또 다른 파괴를 생산할 수 있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 더 좋을 수 있다. 수백억을 들여 회암사 건물을 복원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청산이 나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보고 티없이 살라하는데, 괜한 욕심으로 불국토(佛國土)를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만들지 않을 까 하는 걱정이 든다.

벌써 겨울이다. 눈덥힌 회암사지를 바라보고 천보산을 오르며 무학대사의 흔적을 만날 때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눈이 올때를 기다려야겠다.

김산(홍재인문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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