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 이익 삶과 사상을 따라]10.성호의 군주론
[성호 이익 삶과 사상을 따라]10.성호의 군주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금은 백성을 먼저 얻어야 한다" 위민군주 영조에 큰 영향

“임금이 없어도 백성은 스스로 살아갈 수 있으나 백성이 없으면 임금도 있을 수 없으니 백성이 임금보다 중한 것이다.”

성호가 생각한 임금과 백성의 관계이다. 성호가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는 이론을 제공한 대학자로 성장한 데는 집안의 비극이 도사리고 있었다. 성호 집안의 비극은 조선 19대 왕 숙종이 재위하던 시기에 벌어졌던 일이다. 성호보다 20세 연상이던 숙종은 성호가 40세가 되던 1720년까지 46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숙종은 1674년 14세에 즉위했지만, 수렴청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친정을 할 정도로 총명했다. 갓 즉위한 숙종은 선왕 효종과 현종의 권위를 손상케 한 서인정권을 내치고 남인정권으로 교체하는 당찬 모습을 보였다. 숙종의 결단으로 남인은 인조반정 이후 40년 만에 처음으로 집권당이 될 수 있었다.

소년 왕 숙종에게 장인 김만기와 외삼촌 김석주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하지만, 숙종과 김석주의 만남은 조선 역사의 큰 불행이었다. 숙종을 절대군주의 자리에 올려놓았던 김석주는 조선 500년 역사 속에서 세조의 책사 한명회에 버금가는 공작정치의 일인자였을 뿐 아니라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1680년에 김석주와 숙종이 협력하여 일으킨 경신환국 때 윤휴를 비롯한 남인 지도자가 희생되었다. 성호가 두 살이 되던 1681년 아버지 이하전도 경신환국의 격랑에 휩쓸려 유배지에서 한 많은 삶을 마감해야 했다. 편모슬하에서 자란 성호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1689년에는 다시 서인을 내쫓고 남인을 조정으로 불러들인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이때 숙종은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렸다.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는 자신의 결정에 반대한 괘씸죄 때문이다. 송시열이 누구인가? 숙종의 할아버지 효종과 아버지 현종도 눈치를 살폈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거물 정치인이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은 다시 조정에 밀려나 재기 불능상태에 빠졌다. 이때는 이미 서인도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었다. 남인은 3당으로 밀려나 중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성호가 26세가 되던 해(1706)에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둘째 형 이잠이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경종)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분노를 사 매를 맞다가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아버지처럼 따르던 형이 죽임당하는 참혹한 사건을 겪은 상황에서 과거를 보아 출세하겠다는 생각은 허망한 것이었다. 이후 성호는 농사를 지으며 책을 읽는 ‘사농합일(士農合一)’의 삶을 선택하였다. 성호의 운명을 바꾸어버린 숙종은 1720년에 예순의 나이로 운명했다. 숙종이 재위했던 시기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평가받는 강희제가 재위했던 시기와 겹친다. 강희제를 생각하면 숙종의 역할이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숙종은 왜 이렇게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환국을 일삼았을까? 사실 숙종 이전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군약신강(君弱臣强)”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을 정도로 신권이 왕권을 위협하고 있었다. 결국, 환국은 허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숙종의 변칙 정치였던 셈이다. 이렇게 숙종이 구축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영조와 정조시대의 경제적 번영과 문예부흥을 이룩한 바탕이 마련될 수 있었다. 따라서 환국을 통한 숙종의 왕권 강화를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환국 과정에서 당쟁이 더욱 격화되었고, 너무 많은 신하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그 폐해는 숙종의 두 아들인 경종과 영조, 증손자인 정조는 물론 조선이 끝날 때까지 영향을 미쳤다.

숙종은 총명하고 과단성이 있었지만, 변덕이 죽 끓듯 했다. 임금의 심중을 읽지 못했던 신하들은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게다가 숙종의 가정생활도 성호의 눈에 정상적으로 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질투가 심하다며 부인 인현왕후를 궁궐 밖으로 내쫓았다가, 인현왕후를 받아들인 다음에는 온 나라가 들썩일 정도로 사랑했던 연인이자 왕세자의 친어머니인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런 궁중의 사건을 배경으로 《사씨남정기》와 《인현왕후전》이라는 소설이 탄생하기도 했다. 숙종은 남편으로서나 아버지로서도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성호에게 숙종은 결코 좋은 임금이 아니었다. 성호는 숙종의 모습을 보면서 군신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호는 옛 성현들의 글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맹자》를 펼쳤다.

제나라 선왕이 물었다.
“탕 임금이 걸 임금을 쫓아내고 무왕이 주 임금을 정벌한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옛날 책에 보면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까?”
“인을 파괴하는 사람은 도적이고, 의를 파괴하는 사람은 강도입니다. 도적이나 강도는 하나의 하찮은 장부일 뿐입니다. 한 장부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지만,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맹자는 제나라 선왕에게 어진 정치를 펼치지 못하는 임금은 내쫓거나 죽여도 된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인의를 파괴하는 임금은 임금으로서의 자격을 잃은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대목을 읽으며 성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숙종은 적어도 연산군처럼 일반 백성에게 원망을 사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성호는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서인과 남인으로 갈려 싸우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려 죽기 살기로 싸우고 환국이 반복되는 까닭도 벼슬자리가 부족한 데서 생겨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결국, 이익을 다투면서 빗어진 일이었다. 문제를 찾았으니 대안도 마련되었다. 성호는 놀고먹는 좀벌레를 없애고 생산의 토대가 되는 땅을 백성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릇 임금이 우선 해야 할 일이었다.

성호가 왕도(王道)가 다시 시행되지 않는 세 가지 원인 중 첫째로 꼽은 것이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억누르려는 점”이라고 진단했다. 임금은 자신의 권세를 남용하지 말고 솔선하여 어진 신하에게 자신을 굽혀야 하고, 신하도 이익만 좇지 말고 스스로 자중하면 임금과 신하 모두 현덕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성호는 임금의 권세가 지나치게 높은 것은 잘못이라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성호는 임금과 신하 및 백성과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임금이 해야 할 일은 널려 있었다. 무엇보다 백성의 먹을거리를 풍족하게 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백성을 아들과 같이 여긴다면 부모 된 자의 마음에 어린 아들을 위하여 양곡을 확보하는데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농사에 방해되는 일은 반드시 제거할 것을 생각하며, 또 양곡이 부족할 것을 염려하고 저축에 힘써 흉년에 대비할 것이니, 옛날 백성을 보호하던 방도가 이 같은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성호의 발언은 더욱 분명해진다.

“임금으로서 백성이 없다면 또한 필부에 지나지 않는데, 필부의 양육도 보답하지 못하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거든 하물며 억조창생의 양육에 있겠는가? 임금은 항상 필부의 마음으로써 마음을 삼고 억조창생들도 또한 임금의 마음으로써 마음을 삼아 서로 은혜에 보답하면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성호는 임금과 백성의 관계는 대등하지만, 역할이 다를 뿐이라고 단언했다. 실로 대담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성호는 토지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백성의 삶이 개선될 수 없다고 확신했기에 이 문제를 깊이 고민했다. 아래는 《성호사설》 <득민득인>에 나오는 말이다.

“임금은 백성을 잘 다스려서 백성이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고, 백성은 그러한 임금을 잘 섬겨서 정사를 잘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므로 어느 한 쪽이라도 없어서는 안 되지만, 백성은 있고 임금은 없을 수 있으나, 백성이 없는 임금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임금은 우선 백성을 얻어야 한다. 오히려 백성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성호의 후반생은 영조의 치세에 해당한다. 영조는 즉위 초에 자신을 부정하는 군사반란을 겪었으나 희생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당쟁을 완화하기 위한 ‘탕평책’을 일관되게 밀고 나갔다. 또한, 영조는 검소했고, 백성의 어려움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겼던 위민의 군주였다. 그런 면에서 영조는 성호가 제시한 군주의 자세에 근접하려 애쓴 임금이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연예 24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