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지켜낸 경기도 산성을 가다] 38 . 파주시 덕진산성
[역사를 지켜낸 경기도 산성을 가다] 38 . 파주시 덕진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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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서 조선까지… 축성기술 변화 담은 역사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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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군내면 정자리 산13번지 일대에 위치한 덕진산성의 서쪽 성벽 전경. 파주시 제공
파주시는 지난 8일 고구려 산성으로 알려진 덕진산성(德津山城)의 물을 저장하는 집수지 2기와 서쪽의 초축 성벽을 언론과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천삼백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덕진산성의 집수시설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산성이 자리 잡은 덕진산은 해발 75m로 아주 낮기 때문에 성 안에 물을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집수시설은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시설이다.

지난 2012년부터 올해까지 총 5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진행하며 얻어낸 결과물의 일부이다. 발굴조사가 완료되려면 앞으로도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파주시에 따르면 올해 발견된 집수지 아래쪽을 내년에 추가 발굴해 출수구를 찾으면 당시 배수체계를 확인할 수 있다면서 추가 발굴을 통해 축조된 시기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한편 발굴조사를 담당한 중부고고학연구소는 “축조법이 주변에 있는 호로고루나 고구려 보루의 축성기법과 유사한 점을 미뤄볼 때 고구려 성벽으로 추정된다. …덕진산성은 고구려에 의해 처음 지어진 후 통일신라시대 보ㆍ개축되고 조선시대에 외성이 축조되는 등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축성기술의 변화과정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확인됐다”는 사실을 밝혔다.

파주는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해 치열한 결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진산성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산성이 군사작전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묻혀있던 덕진산성은 지난 1992년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의 ‘파주 덕진산성 정밀지표조사 및 시굴조사’를 통해 실체가 알려지게 됐다. 2012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를 통해 성곽의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나면서 경기도 기념물 제218호로 지정됐다.

성곽의 전체 둘레가 1천384m, 내성 길이 600m에 장대지, 우물지, 덕진당, 문지 같은 다양한 유적지가 확인됐는데 내성의 성벽 기단부에서 고구려 계통의 기와 조각이 여럿 발견됐다. 내성은 해발 85m 봉우리와 임진강변 쪽의 해발 65m 봉우리를 두고 산 능선을 따라 표주박 형태로 구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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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집수지 호안석축 축조 모습
■ 고구려가 쌓은 요새가 신라를 이어 조선으로 이어지다
“현의 남쪽 15리 강변에 위치한다. 초축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석축이 파괴된 지 오래이다. 광해군 때 수축했으나 그 후 다시 폐지됐다”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에 실려 있는 덕진산성에 관한 기록이다. 조선시대에도 산성이 언제 축조됐는지 알지 못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덕진산성은 임진강변에 위치한 호로고루성, 당포성, 은대리성 등과 함께 임진강 북안에 설치된 중요한 성곽으로 조선시대에도 중요하게 활용됐다.

덕진산성은 내성과 외성을 가지고 있다. 내성은 산봉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포곡식성이고 외성은 내성과 연결돼 능선에 따라 축조됐다. 고구려가 축성한 성곽 중에서 임진강 가장 하류에 자리하고 있는 덕진산성은 백제와 신라의 침략을 방어했던 요새였다. 

수나라 당나라의 대군을 막아냈던 고구려도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져 신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신라가 산성을 전면 개축했으니 문무왕이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벌였을 때 신라군이 이곳에 주둔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덕진에 단(壇)을 쌓고 기도처로 활용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임진현의 덕진 등지에 관리를 보내어 비를 빌게 하였다”는 기록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국경이 두만강, 압록강으로 바뀌면서 덕진산성은 한동안 국가에서 단을 쌓고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활용됐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덕진산성은 전략적 요새로 급부상했다. 개전 20일 만에 왜군이 무혈로 도성을 차지했다. 서둘러 구축했던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조선군은 다시 임진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임진강 방어선도 맥없이 무너졌다. 

강(江)이라는 ‘지리(地利)’도 왜군 앞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선조실록>에서 왜군이 “임진강 하류인 덕진단(德津壇) 근처에 목책을 설치하고 참호를 만들어 진지를 구축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왜적도 임진산성이 요새라는 사실을 바로 파악하고 요새를 구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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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 집수지내 짚신 출토 모습
갑옷을 입고 분조(分朝)를 이끌며 조선 팔도를 누볐던 광해군은 임진강과 덕진산성을 주목했다. 광해군은 즉위 초에 산성에서 가까운 임진강 하류 교하에 행궁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광해군은 후금의 침략에 대비해 덕진산성에 외성을 덧붙여 쌓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덕진산성은 반군의 소굴이 됐다. 광해군 말, 장단부사에 임명된 이서(李曙, 1580~1637)가 덕진산성을 쌓을 것을 조정에 요청해 허락을 얻었다. 김류, 신경진, 이귀 등과 반란을 계획한 이서는 덕진산성에서 공공연히 군사를 훈련시키며 ‘그날’을 준비했다.

마침내 1623년 3월 12일 평산부사 이서는 700여 군사를 이끌고 한양 연서역에서 이괄과 합류하여 창의문과 돈화문으로 진군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세웠다. 그해 겨울, 인조가 덕진산성과 파주산성을 비롯한 산성의 수비 상태를 점검했다. 이듬해(1624)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반정의 주역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관군과 반군의 충돌로 조선의 정예 병력이 대부분 사라졌다. 내전으로 정예 병력을 상실한 탓에 3년 뒤에 일어난 정묘호란(1627) 때 방어가 제대로 이뤄지기 어려웠다. 1628년 총융사로 재직하던 이서와 도체찰사 이귀는 덕진산성을 비롯한 주요 산성을 순시했다. 이때 올린 보고서에 경기도 북부의 주요 산성인 덕진산성과 오두성, 행주산성을 언급하고 있다.

“덕진산성 …남쪽으로 큰 강[임진강]에 임했으나 서쪽은 상당히 낮습니다. 그리고 외성은 이미 다 무너져버렸습니다. …교하의 오두성은 한 개의 봉우리에 홀로 서 있는데, 남쪽에 큰 강이 있고 형세가 대단히 험하나 또한 많은 무리를 용납할 곳이 없습니다. …고양의 행주산성은 삼면이 가파르고 서남쪽에 한 가닥 길이 있는데 또한 매우 험난합니다. 우물은 한 개가 있는데 수맥이 작으나 큰 강이 밑에 있어 물을 길을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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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집수지 전경
■ 평화와 생명의 공간으로 거듭나야할 덕진산성
인조반정 때 주력부대를 이끈 장단부사 이서(李曙)의 부인에 관한 설화도 흥미롭다. 이서는 군사를 이끌고 장단을 출발할 때 부인에게 성공하면 돌아오는 나룻배에 붉은 기를 달고 실패하면 흰 기를 달겠다고 약속했다. 나루터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이서의 부인은 멀리에서 오고 있는 나룻배에 백기가 달려 있는 것을 보고 임진강물에 뛰어들었다. 

아내의 자결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이서 앞에 뱃사공이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날씨가 더워 저고리를 벗어 돛에 걸었는데, 그 저고리 때문에 붉은 깃발을 가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서는 아내가 몸을 던진 언덕에 ‘덕진당’을 짓고 원혼을 위로했다. 이후 어부들이 풍어를 빌고 수재를 막기 위해 기원제를 지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덕진산성 건너편에 있는 초평도는 임진강에서 유일한 섬이다. 625전쟁 전에는 논이었던 곳인데 휴전협상 후 사람이 살지 않게 되면서 습지가 돼 생태계의 보고가 된 것이다. 사람 대신 두루미, 흰꼬리수리, 독수리, 물수리, 삵, 금개구리 같은 멸종위기 희귀 동식물들이 자유롭게 찾아드는 생태의 섬이 됐다.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축성기술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우리나라 축성기술사의 보고라는 학계의 평가를 받고 있는 덕진산성이다. 행정구역상으로 파주시 군내면 정자리 산13번지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검색이 되지 않는다. 

군 작전지역이기 때문이다. 민통선 안에 있는 덕진산성을 방문하려면 군부대의 승인을 미리 받아야 한다. 이처럼 덕진산성은 분단의 중심에 있다. 경기 북부지역에는 덕진산성처럼 자유롭게 접근할 수 없는 산성이 여럿이다. 분단 극복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반드시 완수해야할 사명임을 거듭 절감하는 시절이다. 

이경석 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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