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관 칼럼] 학문의 자유를 지킨 역사적 판결
[허성관 칼럼] 학문의 자유를 지킨 역사적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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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1일 대법원에서 학문의 자유를 지킨 역사적인 판결이 있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2015년 자신의 책 <우리 안의 식민사관>에서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김현구의 책 <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를 식민사학이라고 비판하자 김현구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건에 대해서 대법원(주심 김창석 대법관)이 이덕일의 무죄를 확정한 판결이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 등으로 이 판결은 언론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했다.

지금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대부분이 조선총독부가 창작한 소위 식민사학이다. 광복 후 70년이 지났지만 식민사학은 현재진행형이다. 일제가 키운 식민사학자와 그 후예들이 광복 후 우리 국사학계를 장악하여 학문권력을 강고하게 구축했고, 일제 잔재가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누구도 식민사학을 실명으로 비판하지 못했다. 이덕일의 실명 비판은 용기있는 지식인의 모습이었다.

이 고소건에 대해서 경찰과 서울서부지검(이지윤 검사)은 학문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라고 불기소 처분했다. 김현구가 고검에 항고하자 고검(임무영 검사)이 피고를 조사하기도 전에 지검에 무조건 기소명령을 내려 재판이 진행되었다.

서울서부지방법원(판사 나상훈)은 이덕일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1심 재판은 선고 전날 팩스로 이덕일 변호인에게 검사가 제출한 장문의 문건을 보내고, 이 문건을 유죄의 중요 이유로 판결문에 반영했다.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지 않는 문건을 유죄의 근거로 삼은 것인데 항소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는 형사소송법 위반이다.

형사소송법까지 위반하면서 유죄로 판결한 판사가 조선총독부 판사라면 이해할 수 있는 판결이었다. 더 이상 식민사학자를 실명으로 비판할 수도 없게 되고, 일본 극우파들이나 환호할 판결이었다.

학계 원로, 항일가문 후손들,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 역사 관련 단체들, 고위공직을 지낸 원로들은 이 판결에 경악했다. 140여개 역사 관련 단체가 모여 ‘미래로 가는 바른 역사 협의회(미사협)’을 결성하여 힘을 모으고,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벌여 입장을 밝히는 건백서를 법정에 제출했다. 국회의원을 지낸 박찬종 변호사와 법제처장을 지낸 이석연 변호사는 공익변호에 나섰다.

다행히 서울서부지방법원 항소심(재판장 지영난)은 이덕일을 무죄로 판결하여 1심 판결을 뒤집었다. 판결의 요지는 김현구는 식민사학을 추종한 것으로 보이고, 학문적인 논쟁을 법정으로 끌어들여서는 안되며, 식민사학 비판은 공공의 영역이므로 이에 대한 비판은 널리 인정되어야 하며, 이덕일의 비판이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이 아니고 표현의 자유 영역에 속하는 의견표명이라는 것이었다. 이 판결에서 대한민국 법정이 조선총독부 역사관인 매국식민사학을 추종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항소심 판결에 불복하여 검찰은 이덕일을 징역 1년 실형에 처해 달라고 대법원에 상고했다.
검찰이 항소심 판결문을 정독했는지 의심되는 상고였다. 이덕일을 징역보내서 검찰이 지키고자 하는 정의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항소심에서 져서 기계적으로 상고했다면 검찰은 그야말로 영혼이 없는 검찰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대법원 판결은 간단 명료했다. “검사의 상고를 기각한다”였다. 이 판결로 이제 식민사학은 더 이상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다. 역사학에 한문의 자유가 활짝 열린 것이다. 만약 대법원에서 유죄로 판결나면 학문의 자유를 찾아 망명까지 생각했던 이덕일도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대법원의 판결로 학문의 자유는 얻었지만 매국식민사학은 여전히 가장 오래된 적폐다. 우리 사회 적폐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매국식민사학에 닿는 경우가 많다. 중국 동북공정의 앞잡이 노릇을 해온 동북아역사재단 해체를 비롯해서 매국식민사학 청산에 온 힘을 쏟아야 할 때다.

허성관 前 행정자치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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