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주둔 50년 파주 미래유산 보존 시급하다] 중, 애환 품은 생활상들
[미군 주둔 50년 파주 미래유산 보존 시급하다] 중, 애환 품은 생활상들
  • 김요섭 기자
  • 승인 2018.08.23
  •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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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세월의 흔적, 여전히 그 자리에…
▲ 중앙탕1(파주읍 연풍리)
▲ 중앙탕 : 1958년 지어진 중앙탕은 기지천여성들이 동료들의 애환을 듣거나 고향에 달러를 보내는등 소통창구 역할을 톡톡히 한 해방구였다.


지난 22일 이용남 현장사진연구소장(사진작가)의 소개로 어렵사리 만난 A씨(83)는 한때 미군을 상대로 접대부일을 했던 기지촌 여성이었다. 특정기관에 속아서 기지촌 여성이 됐다는 그는 포주의 철통같은 감시속에 미군클럽에서 일하면서 감옥살이 같은하루 하루를 지냈다고 한다. A씨는 어둡던 1958년을 떠올리며 “바깥소식(외부)이 궁금하거나 부모님 동생을 위해 고향에 달러를 보낼려면 목욕탕이 유일했다”고 회상했다.

A씨가 외부 소통 정보공간으로써 활용했던 연풍리 222㎡ 규모의 ‘중앙탕’은 현재 목욕탕을 알리는 간판이 심하게 훼손된 채 방치된 모습이었다. 그는 “중앙탕은 기지촌 여성들에게는 위안이었다. 매일 힘겨울 때마다 목욕탕에 가서 같은 처지 동료들의 애환을 주고 받았다. 때를 벗기려 간다고 했는데 그건 핑계였다”며 “70년대 중반 기지촌 폐쇄 전까지 기지촌 여성들은 포주 몰래 목욕탕 주인에게 쪽지나 달러를 건네 고향에 전달해 달라고 하는 등 목욕탕은 자신의 힘든 처지등을 외부에 알리는 통로였다”며 해방구로서의 중앙탕을 기억했다.
▲ 문화극장 : 파주읍 연풍리소재 문화극장은 1962년 개관됐다. 미군 위문공연은 물론 국가계몽상영등 종합엔테테이트멘트 공간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 문화극장 : 파주읍 연풍리소재 문화극장은 1962년 개관됐다. 미군 위문공연은 물론 국가계몽상영등 종합엔테테이트멘트 공간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당시 주내면(현재 파주읍)이었던 연풍리 골목들은 ‘달러골목’으로 유명했다. 아침에 골목 청소를 하던 사람들이 길가에 여기저기 버려져 있던 달러를 쉽게 주워 생긴 말이다. 뒷주머니에 달러를 넣고 다니던 미군들이 흘린 달러화였다.

주내면에는 1957년부터 극장이 있었다. 서울을 제외한 수도권에 처음으로 생긴 곳이다. 민간과 군에서 운영했다. 민간인 W씨가 1962년 개관해 운영했던 ‘문화극장’은 현재에도 건물보전 상태가 좋았다. 이 작가는 “문화극장에서는 미군 위문공연은 물론 국가계몽상영 등 종합엔터테인먼트 공간이었다”며 “미군 휴양지 역할을 했던 RC 1~4 캠프가 있어 파주에는 극장이 7개나 성행했다”고 말했다.
▲ 웅당초분교 : 1935년 개교된 법원읍 천현초교 분교였던 웅담초교는 1959년 개교됐다. 이일대 미군 기지촌 형성으로 일반인과 혼혈인 학생수들이 급증하자 교육당국이 부랴부랴 웅담리에 분교를 만들었는데 현재 베세트 국제학교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보존이 잘 돼 있다.
▲ 웅당초분교 : 1935년 개교된 법원읍 천현초교 분교였던 웅담초교는 1959년 개교됐다. 이일대 미군 기지촌 형성으로 일반인과 혼혈인 학생수들이 급증하자 교육당국이 부랴부랴 웅담리에 분교를 만들었는데 현재 베세트 국제학교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보존이 잘 돼 있다.

1935년 개교한 법원읍 천현초등학교의 분교로 출발한 웅담초교도 남다른 역사적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1959년 개교된 웅담초교는 이 일대 미군 기지촌 형성으로 일반인과 혼혈인 학생수들이 급증하자 교육당국이 부랴부랴 웅담리에 분교를 만들며 생겼다. 지금은 베세트 국제학교로 사용되고 있는 등 잘 보존돼 있다. 이 작가는 “이 학교 출신으로 델타항공에서 일하는 미군 혼혈입양아였던 나타샤씨(한국명 이은숙ㆍ55)가 자녀들에게 자신의 초교 시절을 보여 주려고 학적부를 확인하는 등 주한미군과 연결된 에피소드가 많은 교사다”고 설명했다.

6ㆍ25전쟁때 파주군 장단면 등지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조리읍 장곡리에서 피난생활하던 주거형태인 움집도 70년가까이 아픈 세월을 여지껏 증언해 주고 있다. 미군이 만든 수용소에 설치된 움집은 미군원조 나무(2m 규격)를 이용해 산비탈에 수수깡, 아카시아나무 등으로 지붕을 엮고 원형, 직사각형으로 땅을 파 구들을 깔았다.
6. 25전쟁때 파주군 장단면 등지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조리읍 장곡리에서 피난생활했을때의 주거형태였던 움집. 70년 가까이 아픈 세월을 증언해 주며 6채 정도가 원형대로 남았으나 별다른 보호대책 없이 방치 돼 있다.
6. 25전쟁때 파주군 장단면 등지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조리읍 장곡리에서 피난생활했을때의 주거형태였던 움집. 70년 가까이 아픈 세월을 증언해 주며 6채 정도가 원형대로 남았으나 별다른 보호대책 없이 방치 돼 있다.

아궁이(화덕)도 있고 연기가 방안으로 들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굴뚝도 설치했다. 크기는 66~99㎡ 규모였다. 당시 장곡리에 지어졌던 움집은 140여 채 정도였으나 6채 정도만이 원형대로 남았다. 하지만 별다른 보호대책은 없어 방치된 상태다.

서울대 아시아연구센터와 파주 움집을 공동연구 중인 이승욱 카이스트 교수는 “장곡3리 움집은 전쟁 피해자인 서민들의 피난생활 주거형태여서 다른 지자체에서는 보기 드믄 보존적 가치를 갖고 있다”며 “파주시가 평화의 시대 전쟁체험 등을 위해서라도 각별히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파주=김요섭기자

사진설명 : 조영애 다큐멘터리사진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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