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OTT와 ‘나는 신이다’

영화, 드라마, 예능 등 대중예술 콘텐츠를 이른바 ‘방구석 1열’에서 시청할 수 있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우리 곁으로 바짝 다가온 역사는 일천하다. OTT의 맏형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넷플릭스가 국내에서 처음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 2016년으로 10년도 채 안 됐으니 말이다. 지상파 방송과 종합편성채널(종편), 케이블 등 기존 미디어에서는 보기 힘든 다양하고 파격적인 소재의 콘텐츠를 무기로 구독자를 늘리면서 일상을 파고들던 OTT는 언제부턴가 대중예술 담론, 미디어 담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됐다. 이는 OTT가 대중예술 산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전통적인 미디어 매체 못지않게 확대됐음을 의미한다. 지난해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 시상식인 아카데미(오스카)에서 OTT 영화 ‘코다’가 작품상을, ‘파워 오브 도그’가 감독상을 거머쥔 사례는 글로벌 영화산업을 이끄는 주축이 전통의 할리우드 제작사에서 OTT 업체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제작된 영화가 극장이 아닌 OTT 개봉을 택하는 경우가 흔한 현상이 되고 있다. ‘선 극장 개봉, 후 타 매체 상영’이라는 영화 제작 및 개봉의 기본적인 룰이 깨진 것이다. 2022년 ‘드라마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에미상 시상식에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 등 6관왕을 차지한 ‘오징어게임’도 OTT 오리지널 드라마다. 날개를 단 것처럼 거침없이 질주하던 OTT는 최근 주춤하는 모양새다. 글로벌 OTT와 토종 OTT의 난립으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가입자 수가 감소하고 있고 일각에서는 ‘위기’를 거론하기도 한다. 이러한 OTT를 새삼 주목하게 만든 콘텐츠 하나가 선정성 논란에 직면해 있다.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다. 이 프로그램은 8개의 에피소드로 나눠 성폭력, 살인 등 사이비종교와 교주의 추악한 실태를 고발하고 있다. 사실 사이비종교와 교주 관련 프로그램은 다른 매체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다뤘을 만큼 내용적 측면에선 신선도가 떨어진다. 그런데도 유독 ‘나는 신이다’가 격렬한 논쟁에 휩싸인 이유는 콘텐츠의 선정성 때문이다. 얼굴만 모자이크 처리한 알몸 여성들의 음부와 음모가 화면을 채우거나 글로 옮기기도 민망한 성행위 언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일부에서 이를 두고 ‘다큐 포르노’라고 비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나는 신이다’ 제작진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담당 PD는 기자회견에서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겠다는 제작 의도를 생각하자면 이번과 같은 형태가 맞는다고 생각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선정성 논란보다 피해 방지에 초점을 맞춘 제작의 방향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읽히는 대목이다. ‘나는 신이다’에 대한 판단은 오롯이 수용자의 몫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OTT 콘텐츠의 선정성 문제를 공론화할 시점이 됐다는 점이다. 지상파 등 다른 방송 매체와 달리 규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OTT 콘텐츠의 노출 및 표현 수위 등에 대한 논란이 반복되고, 특히 ‘나는 신이다’ 공개 이후 논쟁이 격화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해선 곤란하다. 정책 당국은 ‘있는 그대로’를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아침을 열면서] 왕진 가방 든 의사를 본 적이 있습니까

최근 대도시 이외의 지방에서는 의료인력이 없어 긴급한 환자가 발생해도 적절한 수술을 못 한다거나, 최소한의 의료인력을 확보하려 수억원의 연봉을 내걸고 모집공고를 해도 지원자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뉴스가 잇달아 나오고 있다. 게다가 현재 지방 의료체계에 속한 필수 인력마저 언제든 대도시로 빠져나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하니 이는 대한민국 국민이면 당연히 누려야 할 보편적인 의료 서비스가 지방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언제부턴가 대도시 이외의 지방에 사는 국민은 ‘2등 국민’의 신분이 됐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우리나라 지방소멸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한때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개선하고자 국가에서 공공의사를 추가로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했으나 기존 의사집단의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는 기존 의사들이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지방의 국민들을 의료 사각역대로 내몬 최악의 결정이었다. 국가가 의사들에게 배타적인 의료면허를 준 이유는 의사들의 권익을 보호해 주면서도 국가의 의료 서비스에 적절한 역할을 기대한 것이다. 그런데 의사들은 자신들이 챙길 것은 몽땅 챙기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의료 서비스를 국민들에게 골고루 돌려주지 않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왕진 가방을 들고 일반 응급환자를 찾아가는 의사는 옛날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일 뿐이다. 지방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도시에 사는 의사인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읽힌다. 싫으면 너도 의사 되라고? 그래서인지 대입에서 최상위권 학생들은 의대로만 몰리고 있고, 심지어 멀쩡하게 서울대와 연고대를 다니던 학생들마저 자퇴서를 내고 다시 의대에 도전한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들린다. 그것이 진정 의사들이 바라는 세상인가? 솔직히 의사들에게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고 묻고 싶다. 굳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평균 의료인력 통계를 들이밀지 않아도, 그나마 형편이 좋다는 대도시 병원에서도 의사가 모자라 ‘PA 간호사’라는 편법을 쓸 정도로 현재 의료계 인력 부족은 심각한 상태라고 한다. 지금 의사들에게 지방으로 가라고 강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현재의 의사집단이 지방에서 일할 신규 공공 의료인력을 양성할 기회마저 뺏는다면 그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지방에 사는 국민들의 건강을 볼모로 하는 이기적인 행위이며 이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지방의 의료공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공론화했으면 한다. 1안은 국가에서 대도시 이외의 지방 의료 사각지역에서 일할 공공의사를 추가로 양성하되 한시적인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며 신분은 공무원으로 하고, 최소 20년의 의무복무 기간을 설정하며, 그 대신 의사 양성에 소요되는 비용을 100% 국비로 지원하는 방안이다. 2안은 대도시 이외의 지방 의료 사각지역마다 주요 거점 병원을 지정해 원격 진료 및 처치가 가능한 최신 장비를 종합적으로 갖추고 원격 의료서비스를 지원하는 방안이다.

[아침을 열면서] 길이 있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젊음은 아름답지만 노년은 찬란하다. 젊은이는 불을 보지만 나이 든 사람은 그 불길 속에서 빛을 본다. 살다 보면 길을 잃었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기에 잘못된 점을 돌아보고 원위치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면 적절한 개입이 필요하다. 어떨 때는 따뜻한 경고의 말이 충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충격이 필요할 때도 있다. 젊은 세대나 나이 든 세대 모두 지금 처한 상황을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상황을 바라보는 자기 마음가짐을 바꿔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래야 행복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괴로운 건 우리에게 일어난 상황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해 일으킨 어지러운 상념들 때문이다. 진정 쉬고 싶다면 지금 바로 내 마음을 현재의 시간에 온전히 가져다 놓으면 된다. 이것저것 해야지 하는 바쁜 마음은 미래와 과거를 넘나드는 상념일 뿐이다. 현재에 마음이 와 있으면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이 지금뿐이다. 지금 내 마음이 쉬면 세상도 쉬고, 내 마음이 행복하면 세상도 행복하다. ‘사람에겐 저마다의 몫이 있다(to each his own)’라는 격언은 거의 보편적으로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으며, ‘대접받고 싶지 않은 방법으로 남을 대접하지 말라(do not treat others as you do not wish to be treated)’라는 격언도 마찬가지다. 이 두 격언은 해석과 적용에서 차이도 있지만 근본에서는 서로 비슷하다. 우리는 진정 타인이 될 수 없기에 타인을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자기 마음도 다 헤아리지 못하면서 남의 사정을 다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다. 그보다는 그 이해 불능의 사정을 이해하고, 열린 마음으로 남에 대한 자기의 이해를 자꾸 피드백하며 고쳐가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저 사람 몫이 부당해 보이는 건 나의 아상 때문이고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일 수 있다. 그 가능성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내가 대접하는 방식이 그 사람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내 방식을 고수한다면 벽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을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 상당 부분 우리 기대가 우리 마음대로였기 때문이다. 그 예기치 못한 일이 우리를 골탕 먹이자고 일어난 건 아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에겐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라도 떠올리는 게 중요하다.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깨기 위해 무던히 노력할 20, 30대와 가장의 무게를 견디며 치열하게 살아가야 할 40, 50대 그리고 절제된 몸짓과 정제된 언어를 사용해야 할 60대 각자의 입장은 다르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길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니라 가다 보면 길이 생기기는 법이니, 걷다가 마땅치 못한 일을 당해도 행복할 권리까지 망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침을 열면서] 울진 대형산불 그 후 1년

지난해 3월4일의 일이다.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서 산불이 시작됐다. 남동풍을 등에 업은 불은 삽시간에 동해안 방면으로 빠르게 번져 갔다. 소나무 숲을 태운 불씨는 날아들었다. 이른바 비화(飛火). 도깨기불의 실사판이었다. 불은 남대천, 가곡천, 국도 7호선을 가볍게 넘어 울진 한울원전과 삼척 액화천연가스(LNG) 비축기지를 위협했다. 산림 소실을 넘어 국가적 재난으로 커질 수 있는 다급한 순간이었다. 산불 진화 인력과 장비 투입의 우선순위는 원자력발전소와 LNG기지 수호였다. 소방과 산림 당국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다행히 원전 설비 피해 및 방사능 누출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 후방산불은 잡히지 않고 계속 동진해 낙동정맥 방면으로 향했다. 소광리 일대 금강소나무 군락이 위태로웠으나 3월13일 내린 비로 비로소 불길은 잦아들었다. 진정한 단비였다. 지난해 울진삼척 산불은 발화부터 진화까지 213시간이 걸린 역대 최장기 산불로 기록됐다. 피해 면적은 2만ha로 서울 면적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역대 두 번째 규모였다. 주택 319채를 포함해 643개의 시설물이 잿더미가 됐으며 이재민 337명도 발생했다. 산불 이후 곧장 현장을 찾았다. 나무는 숯으로 변해 쓰러져 있었고 바닥엔 시꺼먼 재가 가득했다. 1천도가 넘는 화염에 바위가 쪼개졌으며 대기는 탄내로 가득했다. 숲에 살던 야생동물들은 어떻게 됐을까. 화마가 덮쳤던 절체절명의 순간이 떠오르며 짧은 탄식이 절로 나왔다. 산불로 얼마나 많은 야생동물이 피해를 입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산불은 곤충과 양서·파충류같이 이동성이 약한 동물들에게 더욱 치명적이다. 비행능력을 가진 조류와 재빨리 이동할 수 있는 중대형 포유류는 그나마 피해가 적다. 울진 산불 피해 지역은 멸종위기야생생물Ⅰ급 산양의 전 세계 최남단 집단 서식지이기도 하다. 다만 산양 서식지 일대에는 지표면만 타는 지표화가 발생해 불로 인한 직접적인 산양 폐사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불을 피해 살아남더라도 고난은 이어진다. 겨우내 추위와 먹이 부족으로 체력이 떨어진 산양에게 있어 새순이 돋기 전 3월은 보릿고개에 해당하는 시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까지 나버려 산양의 먹이 부족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이처럼 산불은 많은 것을 앗아갔다. 야생동물 서식지뿐 아니라 임산자원, 토양 영양물질, 숲의 환경기능 손실을 일으킨다. 막대한 양의 탄소배출로 인해 기후변화를 가속화시키기도 한다. 우려되는 것은 최근 들어 대형산불 가능성과 빈도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2, 3월 기온이 높아지고 가뭄이 심화돼 봄철 대형산불 위험이 더욱 커졌다. 앞으로 대형산불은 기후 재난 대비 차원에서 관리하고 대응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1년이 지나 다시 산불 위험 계절이 돌아왔다. 대기와 토양이 바짝 마른 봄에는 작은 불씨에도 산불이 발생할 수 있다. 산림청 자료에 의하면 국내 대부분 대형산불은 실화, 방화로 일어난다. 우리 숲을 지키기 위해 모두가 긴장감을 놓지 않고 산불 예방에 힘을 보태야 할 때다. 올봄엔 검게 타 버린 침묵의 숲이 아닌, 생명력 가득한 연둣빛 신생의 숲을 맞이하길 기원한다.

[아침을 열면서] SM엔터테인먼트 경영권 분쟁

대중음악, 영화, 드라마 등 대중성이 강한 예술 분야를 지칭하는 대중예술은 순수예술에 비해 산업화가 두드러진다. 이러한 대중예술 산업은 흔히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정확한 용어는 아니다. 법적으론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제2조에서 정의하는 대중문화예술기획업이 정확한 표현이다. 대중문화예술기획업은 가수와 배우 등 대중예술인에 대한 훈련과 지도, 상담 등을 하는 영업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연예인을 발굴 및 육성하고 연예활동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회사를 일컫는다. 언론 매체 등에서는 언제부턴가 이를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지칭하고 있는데, 그것은 대중예술 산업에서 K팝을 중심으로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비중과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현상을 반영하는 측면이 있다. 국내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사실상 기획사 시스템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2000년 이후 SM, YG, JYP 등 이른바 ‘빅3’ 기획사의 독주가 한동안 계속되다가 BTS(방탄소년단)를 내세운 하이브가 브레이크를 걸면서 외형적으로는 4강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나 매출 규모면에서는 후발주자인 하이브가 1위에 나서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연예기획사의 현주소다. 그런데 최근 불거진 SM엔터테인먼트의 경영권 분쟁이 진흙탕 싸움으로 치달으면서 연예기획사에 새삼 관심이 쏠리고 있다.‘K팝 원조 기획사’로 불리는 SM의 경영권 분쟁 사태는 최대 주주인 이수만 전 총괄프로듀서와 현 경영진 간의 갈등이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카카오가 현 경영진과 손잡고 9%대 지분 확보에 나서자 이수만은 경쟁사인 하이브를 통해 자신의 지분 중 14.8%를 인수토록 하면서 양측의 대립이 폭발하는 양상이다.  여기에 이수만의 처조카인 현 SM 대표이사가 이수만이 해외에 설립한 기획사를 통해 에스파 등 SM 소속 뮤지션의 음원과 음반 수익을 SM과 레이블 정산 전 6%씩 선취함으로써 역외 탈세 의혹이 있다고 주장하고 나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이에 대해 이수만 측은 법적 대응이 필요한 사안이라는 입장이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다. 양측의 싸움이 소송전으로 비화한다면 법정에서 진실이 가려질 것이다. 하지만 양측의 법적 다툼 여부와 관계없이 SM 사태는 대중예술 산업, 특히 K팝 등 한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연예기획사의 민낯을 드러낸 사례라고 봐야 한다. 연예기획사들이 아이돌과 걸그룹을 앞세워 K팝을 세계적인 콘텐츠로 키운 성과는 인정해야 옳지만 이 과정에서의 그림자를 돌아봐야 할 때다. 일부 기획사들이 대중음악 콘텐츠 수익을 독점하는 독과점 현상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고 연습생들을 상대로 한 이른바 ‘노예계약’과 인권침해 등의 부작용이 해소됐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SM 경영권 분쟁은 본질적으로 메이저 기획사 독식 구조의 고착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결과가 가져올 대중음악의 다양성 훼손 논란과 상식적이지 않은 경영 거버넌스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공론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아침을 열면서] 현재와 같은 교육감 직선제가 답일까

흔히 교육은 백년대계(百年大計)라 한다. 공적인 자리에서 이 말이 틀렸다고 나설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4년마다 돌아오는 선거를 통해 뽑힌 교육감의 성향에 따라 교육정책이 좌지우지되고 이에 따라 교육현장은 갈팡질팡하고 있다. 또 국민들은 교육감들이 선거법 위반 등으로 감옥에 가는 사례들을 목격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교육이 정치의 희생양이 됐다는 뜻이다. 심지어 조부모의 경제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자녀의 성적을 좌우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우리의 교육 현실은 참담하기만 하다. 더군다나 대통령이란 사람은 한 술 더 떠 “교육부의 첫 번째 의무는 산업 인재 공급”이란 말까지 내뱉었다. 우리의 귀를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언제부터 우리 교육의 목표가 이리도 천박해졌을까? 그런데 졸업 후에는 노동자의 신분으로 산업현장에 나서야 하는 고등학교 교과과정 속에 산업현장에서 반드시 필요한 ‘근로기준법’과 기본적인 노동법을 가르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교육 당국은 그저 산업현장에서 적당히 성능을 내는 부품으로 쓰일 정도의 인력 양성만을 원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에게 요구하던 바와 뭐가 다른가? 이 모든 것이 교육의 정치화로 인해 생긴 결과다. 교육과 관련된 문제는 정치가 아니라 교육의 주체들이 주도적으로 풀어가야 한다. 교육의 최고 전문가는 누가 뭐래도 교사들이다. 교사들에게 교육에 관한 재량권이 최대한 주어져야 한다. 현재와 같이 교사들을 각종 규정이나 정해진 틀 속에 가두고 단순한 지식 전수자로 취급하는 환경에서는 교권 확립은 요원하다. 요즘과 같이 스마트한 학생들의 관점에서는 교사들이 학원의 전문강사보다 비교열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교사에게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반면 학생들에게도 선택권을 줘야 한다. 최소한 중등교과과정 이상에서는 지금처럼 1반, 2반, 3반... 하는 식으로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는 강제적인 교육환경 속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대학에서처럼 원하는 선생님으로부터 원하는 과목을 수강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학습 의욕이 생겨나거나 강화되며 주도적인 학습환경이 갖춰질 수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선거로 뽑는다고 해서 교육감의 교육정책에 모든 정당성이 부여된다고 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 현재의 교육시스템이 어떤지, 그리고 교육감이 누군지도 모르고 투표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이런 선거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히려 정상적인 교육환경을 왜곡할 뿐이다. 차라리 교육감 선거권은 교육현장에 직접 관련된 사람들, 예를 들면 교육 종사자와 학부모들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사회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아침을 열면서] 그 이후 그렇게

암 수술 이후 재발 여부를 검사 받는 시간, 기나긴 터널 속에서 빛을 보러 달려가는 두려움처럼 춥고 어둡다. 생각보다 길어 빛이 오래도록 보이지 않으면 불안과 공포로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수술한 부위가 깨끗하긴 한데 종양이나 자그마한 결절이라도 나타난다면 그건 곧바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돌려보면 살아가면서 전에 없던 무언가가 몸속에 나타났다고 너무 공포에 시달릴 필요는 없지 싶다. 우리 몸에 무엇인가 나타난다는 게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일 테니 말이다. 나이 들며 얼굴에 기미와 주름살이 생기고 머리카락이 자꾸 빠지는 걸 받아들이듯 내 몸 어디든 종양이나 혹 같은 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도 받아들일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미리부터 건강염려증에 빠져 건강 쇼핑을 하고 돈과 시간을 소비하다 보면 좋아지기는커녕 걱정 탓에 면역력만 떨어져 오히려 없던 병도 생길 수 있다. 살아 있는 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다독일 줄 알아야 한다. 숫자놀음에 너무 놀아나서도 안 된다. 일례로 결절이 생기면 암에 걸릴 확률이 10배나 높다고 한다. 그런데 그건 상대적 비율이다. 결절이 있는 사람 100명 가운데 5명이 암에 걸리고 결절이 없는 100명 가운데 0.5명이 암에 걸린다는 말이다. 비율로만 보면 10배다. 10배라는 수치에 덜컥 걱정부터 앞선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절이 있어도 100명 가운데 95명은 평생 암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더 중요한 건 얼마든지 대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암 걱정이 있는 고위험군이라면 남들보다 자주 검사를 받으면 된다. 설령 암이 생기더라도 일찍 발견해서 지켜보다가 수상하면 흉강경으로 제거하면 된다. 중년 넘어 나이 들면서 몸에 일어나는 변화는 피하려 안달하기보다 버선발로 나설 것은 아니지만 차분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처음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목에 주름이 오면서 ‘어느덧’ 하는 소리가 안에서 들리겠지만 그때부터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아파 본 사람도 몸에 나타나는 증상이나 검사상의 수치로 불안해하기보다 늘 준비하고 받아들이는 버릇을 들이자. 루이즈 에런슨의 ‘나이듦에 관하여’란 책에서 보면 늙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현대인이 사방 천지 널렸다. 세상은 고사하고 내 인상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고 분노하고 낙심한다. 그런데 그게 우리를 오히려 더 힘들게 만든다. 그렇게 한껏 거부하기보다는 노화를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나이 듦은 장점이 된다. 가정과 직장에서 스트레스 받을 일이 줄고, 삶의 지혜와 결정권은 늘어나 만족감을 키울 수 있다. 눈이 침침한 건 필요한 것만 보라는 것이고, 이가 시린 건 연한 것만 먹으라는 것이란다. 그러니 이제 그 이후 그렇게 받아들이자.

[아침을 열면서] 계묘년, 토끼 안녕!

“두 눈은 도리도리, 앞다리는 짤막, 뒷다리는 길쭉, 두 귀는 쫑긋하여 완연한 산토끼였다.” 조선 후기 판소리계 소설 ‘토끼전’의 한 대목이다. 토끼의 큰 두 눈은 광각렌즈와 같이 넓은 범위를 감시할 수 있다. 짧은 앞다리에 비해 길고 근육이 발달한 뒷다리는 토끼에게 순간적인 도약력을 선물해 줬다. 도망감을 속되게 이르는 ‘토끼다’라는 말은 바로 이 토끼의 뒷다리 힘에 의한 빠른 기동력에서 유래했다. 뾰족 서 있는 두 귀는 주변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달리며 데워진 체온을 식히기 쉬운 구조다. 과연 우리 조상들은 핍진한 묘사로 토끼의 생리적 특징을 완벽하게 노래했다.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멧토끼는 토끼목 토낏과에 속하는 포유동물로 전 세계에서 한반도에만 서식하는 고유종이다.  멧토끼의 학명(Lepus coreanus)에도 당당하게 코리아가 붙었다.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 산과 들에 흔했던 멧토끼는 사람들의 주요한 사냥감이기도 했다. 겨울철 농한기면 마을 아이들이 조직적으로 토끼몰이 사냥에 나섰다. 철사가 보급되고 나서는 토끼가 다니는 길목에 올무를 놓아 잡았다. 고기는 먹고 가죽으로는 목도리, 귀마개며 장갑을 만들어 썼다. 이처럼 생활밀착형 동물이다 보니 산에 사는 멧토끼는 각종 동요와 설화에 단골 주인공으로 출현하며 문화적, 정서적으로 친숙한 동물이 됐다. 하지만 요즘엔 멧토끼가 좀처럼 잘 보이지 않는다. 센서카메라를 활용한 정밀조사에서도 멧토끼의 출현 빈도는 떨어진다. 흔한 야생동물의 대명사였던 토끼가 귀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서식지 변화다. 초식동물인 멧토끼가 좋아하는 먹이는 풀과 나무 줄기이며, 서식지로는 초지와 관목지대를 선호한다. 한편 우리나라 산림은 난방 연료 변화와 녹화사업에 힘입어 반세기 만에 울창해졌다. 이러한 서식지 조건의 변화로 멧토끼가 설 자리는 점차 감소했다. 그나마 넓은 초지가 펼쳐져 있는 시화호 인근과 지리산 노고단 등지에 가면 멧토끼 서식 흔적을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다. 한편 유럽이 고향인 집토끼는 구한말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집토끼는 이베리아반도에 사는 굴토끼(Oryctoiagus Cuniculus)를 가축화한 종이다. 분류학적으로 멧토끼와는 속(屬)이 다르며 생태적 특성도 차이가 난다. 집단생활을 하는 집토끼(Rabbit)와 달리 멧토끼(Hare)는 단독으로 활동한다. 집토끼는 굴을 잘 파고 그 속에서 새끼를 낳고 키운다. 새끼는 벌거숭이에다 눈을 뜨지 못한 상태로 태어난다. 이에 반해 멧토끼는 굴을 파지 않고, 새끼는 털북숭이에 눈을 뜬 채 태어나 바로 활동한다. 1990년대 이후엔 집토끼를 육종한 다수 품종의 토끼가 수입되면서 우리나라에 애완토끼 기르기 붐이 일어났다. 귀엽고 온순한 이미지를 가진 덕에 애완토끼의 인기는 높았다. 하지만 치명적인 귀여움과는 별개로 애완토끼 키우기는 만만치 않다. 체온 조절 능력이 약해 적절한 온습도 관리가 필수적이며, 발바닥 패드가 없기에 바닥은 반드시 푹신한 재질로 마련해야 한다. 이가 평생 자라기에 이갈이를 도와줄 질긴 건초를 수시로 챙겨 줘야 하며, 자주 빠지는 수북한 털을 감당해야 한다. 토끼 기르기 난이도에 절망한 몇몇 이들은 토끼에게 자유를 허한다. “그래 원래 얘들이 살았던 숲에서 마음껏 다니도록 풀어주는 거야”라며 죄책감을 덜어낸 이들은 토끼를 공원에 버린다. 하지만 애완토끼는 품종 개량으로 만들어져 야생에서의 생존능력을 갖추지 못한 존재다. 천적과 굶주림, 추위에 노출된 토끼의 최후는 대개 비참하다. 착각과 무지에 의해 낮아진 도덕적 장벽은 토끼를 죽음으로 내몬다. 멧토끼, 집토끼, 애완토끼. 이처럼 각자 삶의 무게를 진 토끼들의 운명은 우리 인간에 의해 많은 부침을 겪었다. 토끼에 대한 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토끼와의 공존은 가능할지 모른다. 이제 곧 정월대보름 둥근 달이 차오를 테다. 지금껏 달에게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면 이번 계묘년 보름달 옥토끼를 보면서는 한 번쯤 토끼들의 안녕을 빌어 주는 건 어떨까.

[아침을 열면서] ‘이승기 사태’가 마지막이어야 하는 이유

문화산업은 순수예술과 대중예술(대중문화) 관련 산업을 아우르는 ‘빅 키워드’다. 그러나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문화산업은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본격적으로 다뤄진 측면이 있다. 독점 자본주의하에서 문화예술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산업으로서 존재한다는 논의가 대두됐던 것이다. 독일의 저명한 사상가이자 사회철학자인 아도르노가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를 처음 제시한 것도 이때였다. 문화산업은 그것이 대중에게 미친 긍정적, 부정적 영향 등 학문적 논의와는 별개로 산업적으로 성장을 거듭하면서 선진국을 중심으로 국가경제의 주요한 한 축이 됐음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문화산업을 본격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한 김대중 정부부터 현 윤석열 정부에 이르기까지 30년이 훨씬 넘도록 문화예술을 산업적으로 발전시키려는 데 재정과 인력을 쏟아부었다. 윤석열 정부는 국정과제로 ‘K콘텐츠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공정한 산업생태계 구축’을 제시하고 있을 정도다. 역대 정부의 이러한 물량 공세 시도는 일정 부분 효과를 발휘했다고 본다. 대중예술 산업을 비롯한 문화산업 전체 규모가 매년 증가세를 보이고 있고 특히 게임과 웹툰 등 온라인 기반의 문화콘텐츠는 비약적 성장이 이어지는 추세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주춤하긴 했으나 케이팝과 영화, 드라마 등도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인기를 누리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성적표를 놓고 본다면 문화산업 분야 종사자들도 자부심을 느껴야 하고 문화산업 시장에 새로 진입하려는 인재들로 북적이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최근 ‘이승기 사태’에서 확인된 것은 아이러니다. ‘이승기 사태’는 표면적으로는 배우 겸 가수 이승기와 소속사 간의 음원 정산 분쟁이 원인이지만 본질은 불공정한 문화산업 생태계로 봐야 한다. 스타급 연예인인 이승기에 대한 소속사의 인식이 이 정도인데 일반 대중예술인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고용노동부가 최근 연예기획사 등을 대상으로 근로감독을 실시한 결과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거나, 임금명세서를 주지 않거나, 휴일근로수당도 미지급한 사례가 43건이나 적발된 것은 양적 성장에 치중한 문화산업의 어두운 그늘이다. 음원 수익금 정산을 둘러싼 ‘이승기 사태’의 진실 공방은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다. 관건은 ‘이승기 사태’가 마지막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문화산업의 규모의 성장 못지않게 이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숱한 부작용과 허점을 제도적으로 방지할 방안을 정부가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소속사와 예술인 사이에 형성된 위계적 관계를 대폭 개선하거나 계약서 관련 조항을 강화하는 방향으로의 법령 정비 등이 그 시발점이 될 것이다.

[아침을 열면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견월망지(見月忘指)라는 말이 있다. 흔히 하는 말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 끝은 왜 보고 있나’라는 뜻이다. 사람이 수단에 매달리다 보면 정작 목적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조금 다른 표현으로 ‘겨우 잠든 불면증 환자 깨워 수면제 먹이기’도 있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놓일 때가 있다. 왜냐하면 보통사람들의 수준이 다 고만고만하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와 같은 강한 신념이 개입하면 더더욱 판단이 흐려질 수 있다. 이럴 때는 한 발짝 떨어져 큰 그림을 보려고 노력하면 도움이 된다. 필자가 친목 모임에서 만나 알게 된 분 중에 대학 선배이자 목사직을 겸임하면서 모 신학대학의 교수직에 계셨던 손 모 목사가 있다. 2016년 한 개신교 광신도가 모 사찰에 난입해 불당을 난장판으로 만든 사건이 공중파 뉴스로 전국에 알려진 일이 있었다. 이때 손 목사는 주변의 뜻있는 분들과 함께 기독교계의 사과문을 온라인에 게시하고 불당의 원상복구를 위한 모금운동까지 주도하셨다. 그런데 종교의 평화를 위해 애쓰신 이분에게 돌아온 것은 신학대학으로부터의 해직 처분이었다. 일부 기독교계의 자성의 목소리와 움직임을 대승적으로 수용한 불교 측에서 감사와 화해의 강연 자리를 마련했는데 거기서 손 목사는 ‘예수는 육바라밀을 실천한 보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런데 신학대학 측은 이 문구를 문제 삼아 손 목사를 그간 이교를 돕는 배교 행위를 해왔으며 신앙적으로도 이단이라고 규정하면서 해직 처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손 목사의 행위는 종교 평화를 위해 애쓴 진정한 기독교인의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판단할 것이며, 타 종교인들에게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예수를 전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비칠 것이다. 대한민국 법원의 판단도 상식을 벗어나지 않았다. 고등법원까지 손 목사는 부당하게 해고당했음을 판결문에 적시했다. 그러나 아직도 신학대학 측은 손 목사의 정상적인 복직을 거부하고 있다. 기독교계에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전형적인 사례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석가탄신일에 조계사 앞에 몰려가 예수 믿으라고 소리치고 찬송가를 불러 뉴스에 나온 적도 있고, 최근에는 대구 이슬람 사원 건축현장에 몰려가 이슬람교에서 터부시하는 돼지고기를 굽는 등 타 종교에 대한 배려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일들을 벌이고 있다. 대한민국의 개신교계는 왜 이리 됐을까? 이는 개신교계가 달이 아니라 손가락만 찾는 심각한 자기 모순 상황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목사의 우상화’다. 기독교의 최고 권위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성서’에 있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목사의 설교가 ‘말씀’이라고 특별 대우를 받고 있으며 심지어 성서의 대체재로 치부되는 현상까지 보인다. 아울러 목사 및 목사의 설교에 대한 이의 제기는 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새다. 오죽하면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일반 기독교 신도들의 태도도 문제가 있다. 교회를 선택할 때 달이 아니라 손가락을 찾고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성서의 말씀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목사의 설교가 좋다는 평판을 기준으로 교회를 선택하는 것이 보편화됐다. 그래서 같은 기독교인이라도 천주교인들은 누구든 집에서 가까운 성당에 다니지만 개신교인들은 집에서 먼 교회를 일부러 찾아다니는 것이 다반사다.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정상인데, 언제부턴가 대한민국은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고 있다. 제발 달을 보자!

[아침을 열면서] 검은 토끼야 날아가자

2023년 계묘년(癸卯年)이 밝았다. 검은 토끼의 해인데, 민속학자들에 따르면 토끼는 지혜로움과 귀여움, 무병장수와 장생불사를 상징한다. 모두 그런 한 해가 됐으면 한다. 코로나19로 시작된 공포에 평범함이 뒤바뀌고 포스트 코로나를 기대했으나 위드 코로나로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좀 무뎌졌을 뿐이다. 그러면서 사람이 얼마나 대단하지 또 배웠다. 마스크를 줄곧 쓰는 것, 사회적 거리두기를 늘 걱정하는 것, 가고 싶은 곳 가지 못하고 참는 것 등 힘든 게 한둘이 아니건만 사람들은 다 참았다. 참다 보면 무뎌지기도 한다. 그래서 또 산다. 삶의 기쁨을 누리는 가장 쉬운 길은 현재(거기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다.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또 걸리면 심하지 않아서 다행으로 받아들인다. 그 대표적인 게 이솝우화에 나오는 개 이야기다. 제 입에 물린 고기 맛을 음미하고 만끽하면 좋으련만 물속에 비친 제 입의 고기가 더 커 보여 짖다가 제대로 먹지도 못한 고기를 놓쳐 버린다. 놓친 고기는 물에 떠내려가 되찾을 수도 없다. 사람들도 많이 그런다. 지금 여기 몸 성히 안전하게 있으면서 저기 나보다 더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내일을 걱정하고, 어제 고기 놓친 걸 후회한다. 걱정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데 우리가 하는 걱정은 대부분 일어나지 않을 일이란다. 누려 만끽해도 좋을 순간을 공연한 걱정에 허비하면 그 순간은 놓친 고기처럼 우리 삶에 아무런 영양가도 주지 못한 채 세월의 물결에 쓸려 가버린다. 새해를 시작하며 좋은 순간에는 그냥 좋은 감정만 느끼는 버릇을 들여보자. 불안과 걱정은 일부러 찾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올 터, 그저 눈앞의 기쁨에 집중하자. 삶에서 만나는 작은 기쁨들이야말로 우리 삶의 자양분으로 내일을 더 잘 살아갈 힘을 준다. 남들에게 존경받을 때보다 내가 나를 사랑할 때 진정 내가 귀해진다. 내가 나를 잘 대접해야 내 가치도 높아진다. 행복의 기준도 어디까지나 나에게 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알며 순간을 만끽하는 계묘년을 만들어보자. 우리가 지금 당장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또 인생의 방향을 획 바꿀 수도 없다. 그런 시도를 한다면 그야말로 작심삼일도 아니고 삼 초면 끝이 날 터이다. 일상도 방향을 다 바꾸긴 힘들지만 그래도 작은 노력을 꾸준히 기울이면 더러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생긴다. 그런 작은 일상의 변화를 만들려면 당장 시작해야 한다. 내일부터 하자고 하면 그 내일은 영원히 오지 않기 쉽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뭐라도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다는 말도 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면 무기력한 감정만 남지만 무언가 시도하면 최소한 실패의 경험이라도 남지 않겠는가. 그 경험은 더 전략적으로 다음 도전에 접근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다. 검은 토끼 더 달아나기 전에 시작하자.

[아침을 열면서] 생명의 터전 화성습지

화성습지를 처음 찾았을 때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은 ‘DMZ 중부전선 풍경같다’는 것이었다. 드넓게 펼쳐진 초지며 중간중간 박혀 있는 습지가 조화를 이루는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둑방길 따라 삵, 너구리, 고라니의 배설물이 나를 반겼다. 경기도에도 아직 이런 곳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과거 갯벌이었던 남양만 지역은 지난 한 세기 동안 큰 변화를 겪었다. 1991년부터 2012년까지 시행된 화옹지구 간척사업으로 갯벌이 메워지고 거대한 방조제와 담수호가 만들어졌다. 한편 화옹지구 바깥쪽 매향리는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미군의 폭격장으로 사용됐다. 50년간 동안 포탄 세례를 맞아 갯벌은 황폐해졌다. 이러한 아픔을 딛고 자연은 기어이 되살아났다. 시간이 흘러 농지 수자원 확보를 위해 조성된 담수 지역이 습지의 기능을 되찾고, 각종 개발 영향에서 벗어나 중요한 생물 서식지로 거듭났다. 매향리는 미군이 폭격장 운영을 중단하면서 갯벌 생명들이 돌아왔다. 갯벌, 염습지, 기수습지, 민물습지, 초지, 농지가 어우러져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는 독특한 자연환경을 지니게 됐다. 방조제를 중심으로 외측은 바다와 갯벌, 내측은 담수인 화성호와 농경지로 구분돼 있다. 방조제 내측 화성호 일부 지역은 기수역이 형성돼 염생식물이 드넓게 자리를 잡았고 일부는 갈대와 물억새 군락이 우점한다. 화성습지는 시베리아와 호주 대륙을 오고 가는 철새들의 중간 기착지 및 휴식처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018년에는 국제적 철새 희귀종 및 바닷새의 경유지로서 보전가치를 인정받아 EAAFP(동아시아-대양주철새이동경로 파트너십)에 등재됐다. 먼 길 떠나는 큰기러기, 큰고니, 노랑부리저어새, 저어새, 검은머리물떼새, 알락꼬리마도요들이 화성습지에서 부지런히 배를 채운다. 하지만 습지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이 존재하는 만큼 보전과 개발이라는 이해가 충돌하기도 한다. 생물들에게는 중요한 서식 공간인 한편 누군가에는 거대한 미개발지이자 자본증식 기회의 땅으로 비친다. 따라서 이 소중한 자연자원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 수립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화성습지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세밀한 공간계획 마련이 필수적이다. 어디를 보전하고 어디를 이용할 것인지, 생물다양성 확보와 지역주민의 삶이 조화롭게 상생할 수 있는 공간 배치는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화성습지는 ‘역사적 아픔’, ‘생태계의 회복력’, ‘의도하지 않은 자연의 재탄생’이 어우러져 복합적 의미를 가진 장소인 만큼 보전을 위해 농민, 어민, 시민단체, 지자체 파트너십 기반의 원활한 소통과 협력이 중요하다. 도시화 및 난개발로 야생동물 자연 서식지가 비가역적으로 감소하는 경기 남부지역에서 화성습지의 역할은 더욱 커질 것이다. 한편으론 대규모 생물 서식지 기능뿐 아니라 담수지역의 자연 회복 과정을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관찰할 수 있는 훌륭한 사례인 점에서 화성습지의 가치를 새롭게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2022년이 저무는 낙조에 퉁퉁마디 군락은 물론 순백색의 큰고니마저 붉게 물들었다. 이 고즈넉한 풍경을 5년 뒤,10년 뒤에도 아니 우리 후손들도 볼 수 있길 기원해본다.

[아침을 열면서] 사회적 약자의 문화예술 향유 권리 ‘배리어프리’

비장애인에게 문화예술 향유는 하나의 ‘일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측면이 있다.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하고 공연·전시 관람 등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일차적으로 수반돼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비장애인의 문화예술 향유는 근본적으로 개방성의 특징을 지닌다. 문화예술 소비는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가 제시한 인간의 다섯 가지 욕구 중 가장 높은 단계인 ‘자기실현’ 욕구, 즉 자기계발과 자아실현에 해당한다. 소비자는 다양한 문화예술 참여 활동을 통해 자기실현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심각한 불균형이 발생한다. 비장애인의 거침없는 문화예술 소비 접근과 달리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의 문화 향유에는 커다란 장벽이 버티고 있다. 이를 전문 용어로 ‘배리어'(Barrier)’라 부르며 자막이나 수어 통역, 음성 해설 등을 통해 문화예술 관람 장애를 없애려는 시도를 ‘배리어프리’라고 한다. 사회적 약자에게 문화예술 소비는 설렘과 즐거움의 대상이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라고 보는 게 옳다. 그 원인은 접근성의 결여에서 찾을 수 있다. 신체적 불편함을 안고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들이 보고 싶은 연극이나 콘서트, 전시, 영화 등 문화예술 콘텐츠 제공 시설에 무난하게 접근하기란 구조적으로 어려움이 따른다. 가족이나 친구 같은 조력자가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문화예술 공간 접근 자체가 버거운 일이다. 가까스로 문화예술 시설에 들어서는 데 성공했더라도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리어프리 인프라가 확보돼 있지 않으면 문화예술 향유는 또 한 차례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는 정부 데이터에서도 확인된다.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발표한 ‘2021 공연예술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장애인석을 갖춘 공연장은 전체의 57.5%에 불과했고 대학로 공연장 120곳에 대한 조사(2018년 기준)에서는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도움 없이 들어갈 수 있는 공연장은 불과 14곳뿐이었다. 대학로 공연장의 대부분이 통로가 비좁고 계단이 가팔라 사회적 약자에게 심각한 ‘배리어’가 되고 있다는 결론이다. 장애인 전용석은 거의 맨 앞이나 맨 뒤에 위치해 시야가 보장되지 않거나 선택의 자유를 막고 있다. 문화예술 분야의 배리어프리가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쉽다. 배리어프리가 적용되고 있는 문화예술 콘텐츠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은 콘텐츠가 사실상 전부나 마찬가지다. 만성적인 재정난을 겪고 있는 민간 극단이나 제작사 등은 배리어프리 도입 시 소요될 별도의 예산 때문에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 관람 방해 등을 이유로 배리어프리에 부정적인 비장애인들의 인식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장애인들이 배리어 걱정 없이 비장애인처럼 유명 가수의 콘서트를 즐기고, 인기 뮤지컬에 환호하고, 클래식 연주에 푹 빠져 드는 경험을 하는 것은 우리 헌법과 문화기본법에도 규정된 문화적 권리다. 주말에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장애인은 6.9%에 불과한 반면 비장애인은 20.1%라는 정부 통계 수치(2019년 기준)는 사회적 약자 대상의 배리어프리 확대 필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김진각 성신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아침을 열면서] 지하철 탄 풍경

얼마 전 필자가 탔던 지하철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객차 내부는 착석한 승객과 입석 승객의 숫자가 엇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한눈에도 70대쯤으로 보이는 큰 덩치의 백발 노인이 탑승한 뒤 경로석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경로석에는 노인들 사이에 중장년쯤으로 보이는 작은 체구의 승객이 한 명 있었다. 백발 노인은 그 사람 앞에서 “어른이 앞에 서 있는데 왜 경로석에 앉아 있느냐”라면서 시비를 걸었다. 처음에는 앉아 있던 승객이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주변 승객들이 들으라는 듯 백발 노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급기야 ‘배운 것도 없는 어린 놈의 자식’이라는 등 거친 언사를 쏟아내자, 이번에는 앉아 있던 승객도 지지 않고 자기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다며 응수했더니 심한 욕설이 난무하는 말싸움이 돼 버렸다. 주변 노인들이 말려도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앉아 있던 승객이 자기 주민증을 꺼내 보이며 “내가 보기에는 염색해서 그렇지 XX년생이다. 너는 몇 년생이냐? 네 주민증 한번 까봐라” 했더니 객차 안의 승객들 시선이 일제히 그 백발 노인 쪽으로 쏠렸다. 그러자 백발 노인은 갑자기 바닥에 드러누워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십중팔구 자기보다 더 나이가 많았으리라.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는 자신의 감각을 기준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것에서 온다. 하지만 객관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감각이란 신뢰할 수 있는 척도가 전혀 아니다. ‘착시현상’이 대표적이다. 똑같은 크기의 옷이라도 가로 방향 줄무늬보다 세로 방향 줄무늬가 더 키를 크게 보이도록 만든다.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퇴역 군인들을 대상으로 장기간에 걸쳐 추적 조사를 한 보고서가 발표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군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전투 경험담이 점점 강화되는 추세를 보였고 심지어 행정병이어서 전투현장에 없었던 군인들마저 그런 경향이 보고됐다. 즉, 기억의 왜곡이 일반적으로 관찰됐으며 대부분은 왜곡된 기억을 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현대물리학에서는 원자와 그 이하의 미시적인 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그런데 완전히 상반되는 두 상태가 한 시점에 공존할 수 있다는 양자역학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 세기에 걸쳐 유명한 논쟁이 있었다. 예를 들면 동전을 던지면 앞면 또는 뒷면의 두 가지 경우만이 나와야 하는데 앞면과 뒷면이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슈뢰딩거의 고양이’라고도 표현되는 양자역학의 모순점은 분명 우리의 감각 세계에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은 이렇게 되묻고 있다. “왜 인간의 감각과 언어가 척도가 돼야 하나?” 그래서 현대물리학은 양자역학의 모순점에 대한 공격에 이렇게 답한다. “Shut up, and calculate it!(닥치고 계산이나 해!)” 즉, 양자역학의 내용을 인간의 감각과 표현으로는 모순점을 도저히 해결할 수 없지만, 그건 인간의 문제이지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양자역학의 파동방정식은 현재 모든 전자제품의 제조에 전혀 오차가 없이 적용되고 있다. 즉, 내게 보이고 들리는 것이 모든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내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까지 고려해야 한다. 심지어 내가 알지 못하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려면 겸손해져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그릇을 계속 키우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되새겨 보자. 최동군 지우학문화연구소 대표

[아침을 열면서] 세월이 가르쳐 주는 것

나이 들면서 얻은 좋은 배움 하나가 있다. 바로 천천히 운전할 줄 아는 능력이다. 언젠가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천천히 운전할 줄 아는 것도 능력이라고. 젊을 때여서인지 말이야 막걸리야 하며 흘려듣고 말았다. 그때는 속도제한 아래로 가는 게 손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속도제한이 없는 구간이 있는 아우토반을 달리며 학생 처지의 차라서 더 빨리 달릴 수 없는 걸 아쉬워하며 빠른 속도감을 만끽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차의 진행을 가로막는 앞의 차들이 한심하다 못해 부아를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빨리 달리지 않을 권리를 인정하지만, 그러려면 그에 합당한 차선을 타면 되는데 느리게 달리면서 굳이 1차선을 고집하는 심보는 뭐란 말인가. 클랙슨 울리는 걸 무척 삼가는 독일에서도 저런 경우에는 사정이 없다. 다같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다른 데서 그렇게 경적을 울리면 고소를 당할 수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비로소 속도제한을 넘지 않고서도 느긋하게 달릴 줄 알게 됐다. 앞에서 꾸물거려도 이제는 무슨 사연이 있겠지 하며 이해가 된다. 지인 중에 느지막이 학원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있다. 언젠가 이런 소리를 했다. 처음 한 6~7개월 운전하다 보니 동네가 작아서 그런지 신호 순서를 다 외우게 됐단다. 그때부터 효율성을 추구하는 성과주의란 뱀이 머리에 똬리를 틀었단다. 그래서 유난히 신호대기가 긴 신호가 바뀐다 싶으면 길을 우회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리하기도 하면서 빨리빨리를 실천해 갔다. 그러자니 앞에서 꾸물거리는 차들에 화가 나 어느 순간 욕이 튀어나오더란다. 아이들 태운 차에서…. 그 순간 정신의 급브레이크를 밟고는 그 효율이 대체 얼마나 되나 짚어보았더니 아무래도 위험 가능성이며 스트레스를 상쇄하고 남을 정도는 되지 않겠다 싶더란다. 그때부터 애써 마음을 비우며 신호를 생각하지 않고 따르려고 했단다. 녹색 신호등이면 가고, 다른 불이면 멈추고. 그러며 얼마 지나니 운전하며 피로하거나 스트레스 받는 일이 거의 없어졌단다. 사회의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줄에서 앞에 선 사람은 남보다 정신을 더 차려야 한다. 신호를 기다리는 차들에서 맨 앞의 차를 모는 사람이 해찰해 시간을 까먹으면 혼자 시간만 버리는 게 아니라 뒤에 있는 사람들 모두의 시간을 빼앗는 셈이다. 그래서 그건 일종의 에티켓이자 사회적 책임이기도 하다. 그렇긴 하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모르는 사이에 실수하기도 한다. 젊어서는 용납되지 않지만 나이가 들면서 화를 내기 전에 분노의 클랙슨이 아니라 넌지시 보내는 주의의 짧은 경적을 보내거나 아니면 기다려줄 줄도 알게 됐다. 바로 나이의 선물이다. 계절의 흐름을 따라 나무들이 나뭇잎 다 떨구고 시린 알몸으로 침묵의 동안거 수양에 들어갔다. 세월 따라 결따라 살자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 본다. 세월이 가르쳐준 그 진솔함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김근홍 강남대 교수·한독교육복지연구원장

[아침을 열면서] 우리 곁으로 돌아온 수달

몇 해 전 일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오산천 둑길을 걷는데 어디선가 고주파 소리가 들려왔다. ‘삐익삐익’, 밤중에 웬 새 소리인가 싶었다. 소리가 나는 쪽에선 자맥질을 하며 수면 위 파동을 남기는 괴생명체의 실루엣이 보인다. 길고 매끈한 몸뚱이에 도톰한 꼬리를 가진 녀석의 정체는 바로 수달이다. 시민들의 발걸음과 가로등 불빛, 자동차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달 두 마리의 유영은 한동안 이어졌다. 수달은 식육목 족제빗과에 속하는 포유동물이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숲과 들이 아니라 강과 저수지 등 물을 끼고 살아간다. 몸길이의 3분의 2에 달하는 긴 꼬리는 물속에서 방향타 역할을 한다. 머리는 납작하고, 몸은 유선형으로 물의 저항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 다섯 개의 발가락 사이엔 물갈퀴가 있어 헤엄치기 좋다. 귀는 작고 콧구멍은 수중에서 자유자재로 여닫을 수 있다. 입 주변에 난 수염은 물흐름과 물고기 이동을 추적하는 레이더 역할을 한다. 그야말로 수달은 수중생활에 최적화된 신체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천에서 주로 생활하고, 수영을 잘하는 만큼 수달의 먹이는 물고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블루길, 배스 같은 생태계 교란종을 잡아먹기도 한다. 그 밖에도 개구리, 민물게 등 양서·파충류와 갑각류를, 드물게 흰뺨검둥오리, 물닭, 논병아리 같은 수변에 사는 새를 사냥하기도 한다. 이처럼 수달은 우리나라 하천 생태계 먹이사슬에서 최정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수생태계의 건강성을 나타내는 지표종이기도 하다. 수달이 서식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천의 먹이사슬 구조가 안정적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또 수생태계의 질서, 즉 먹이사슬의 균형을 조절해주는 핵심종으로 그 역할이 중요시되고 있다. 수달은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멸종위기근접종’, 환경부 ‘멸종위기 1급 야생생물’로 지정된 멸종위기종이지만 다행히 과거에 비해 서식 분포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 중랑천, 부산 온천천, 대구 신천, 전주 전주천 등 도심하천에서도 수달 서식이 확인되고 있다. 경기도에도 황구지천, 안성천, 오산천, 탄천, 경안천 등 과거 서식 기록이 없던 하천에서 수달이 출현하고 있다. 하지만 서식 범위가 확장되었다고 해서 결코 수달 보호에 대한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 수달은 하천을 따라 생활하므로 생활기반이 좁으며 하천생태계 교란에 취약하다. 한정된 서식공간을 두고 개체 간 경쟁도 치열하므로 서식밀도는 높지 않다. 하천을 직강화하고 콘크리트 제방을 쌓는 등의 하천정비사업은 수달의 은신처와 보금자리를 앗아간다. 댐, 수중보 같은 하천구조물은 수달의 이동과 개체군 교류를 막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또한 수달은 최상위 포식자인 만큼 화학물질과 중금속 생물농축에 취약하며, 물고기를 잡기 위해 설치한 그물이나 통발에 희생되기도 한다. 일본의 경우 수달이 1980년대 들어 자취를 감췄으며 결국 일본 정부는 2012년 수달 멸종을 공식 선언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를 찾은 일본 동물학자들은 한국의 수달 존재 자체를 부러워한다. ‘있을 때 잘하자’라는 교훈을 되새겨 봄직하다. 경기도를 적시는 하천별로 맞춤형 수달 보호종합계획을 마련해 서식지 보전방안을 실천하고 위협 요인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산에 호랑이 표범은 사라졌지만 우리 강에 수달은 살아남아 참으로 다행이다.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고 있는 수달을 반갑게 맞이하자. 우동걸 국립생태원 박사

[아침을 열면서] 원로배우 전성시대, 그 묵직한 함의

20세기 초 러시아의 저명한 연극 연출가이자 연기 이론가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1863~1938)와 스타니슬랍스키의 사실주의 연극 기법을 한국에 처음 소개한 연극의 선구자 이해랑(1916~1989)이 살아있었어도 지금의 한국적 연극 상황을 감지하진 못했을 것 같다. 전례 없는 ‘원로배우 전성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이 현실을. 순수예술 장르를 대표하는 연극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주인공이 연기에 한창 물이 오른 30, 40대의 배우가 아닌 70대 이상의 원로배우라는 사실은 한편으론 놀라우면서도 그것의 함의는 결코 가볍지 않다. 무대에서 열정을 쏟아붓는 원로배우들의 행보는 데이터로 확인된다. 티켓 예매 사이트인 인터파크에 따르면 올 들어 11월 현재까지 연극 티켓 판매 점유율 중 70대 이상의 배우들이 주연을 맡거나 조연으로 등장한 연극들이 대거 상위권을 점령하고 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유명세를 탄 오영수(78)와 신구(80)가 주연한 ‘라스트 세션’이 전체 5위를 기록한 것을 비롯해 박정자(80), 손숙(78), 전무송(81) 등이 출연한 ‘햄릿’ 6위, 오영수와 박정자가 출연한 ‘러브레터’ 18위, 신구와 정동환(73), 서인석(73)이 주연한 ‘두 교황’은 19위에 각각 올랐다. 90세를 바라보는 이순재(88)가 백일섭(76), 노주현(76)과 함께 열연 중인 ‘아트’ 역시 흥행 순항을 하고 있다. 예전에도 대중적으로 알려진 원로배우가 주연으로 나선 연극이 큰 관심을 끌면서 티켓 파워를 과시한 사례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일부 공연에 국한됐다. 올해처럼 연기 경력 50년 이상(이순재는 66년의 연기 경력을 갖고 있다)의 원로배우들이 대거 연극계에 뛰어들어 흥행몰이를 주도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연극의 대중화 기여라는 측면에서 일단 긍정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 등 대중적인 영상매체를 통해 익숙한 유명 원로배우의 농익은 연기는 연극의 주 관객층인 20, 30대 여성은 물론 연극 장르에 무관심했던 중·장년층을 공연장으로 이끌면서 문화예술 콘텐츠의 기초가 되는 연극의 저변 확대에 일조한다. 그럼에도 놓쳐선 안 될 지점이 있다. 원로배우들의 활약이 연극을 넘어 공연예술 전반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동력이 돼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작품의 흥행 못지않게 신인 연기자를 육성하고 전문 배우의 연기력을 키워야 하는 숙제가 문화예술계, 특히 공연예술계에 주어져 있으나 해법이 난망하다, 더구나 이 같은 상황에서 흥행을 위해 유명 배우와 지명도 높은 연출가를 앞세운 이른바 ‘스타 마케팅’이 공연 제작의 공식처럼 고착화된다면 연극적 토양은 척박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로배우 전성시대는 공연예술 발전의 기회이자 위기이기도 하다. 나이를 잊은 원로배우들의 거침없는 활동이 연극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촉매제가 됐다면, 남은 과제는 코로나19 이후 위축된 공연계를 돌아보고 발전을 도모하는 데 모아져야 한다. 원로배우의 역할은 무대에 머물러선 안 된다. 이들의 연기적 노하우와 혜안을 정책 당국의 의지와 접목해야 할 때가 왔다. 김진각 성신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아침을 열면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장면 1 : ‘초등학교 1학년생에게 모르는 어른이 다가와 우체국으로 가는 길을 자세히 알려 달라고 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성인들이 기대하는 대답은 ‘아는 대로 자세하고 친절하게 말씀드린다’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초등학교에서는 조금 다르게 가르친다고 한다. ‘아는 곳이더라도 낯선 사람이 길을 물으며 특히 같이 가달라고 하면 단호하게 거절한다’가 정답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정말 도움이 필요한 어른이라면 어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초등학생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래서인지 요즘 주변의 초등학생들에게 뭔가를 물어보거나 말을 걸면 상냥한 태도로 대하기보다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훑어보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세상이 참으로 각박하게 변하고 있구나’를 느끼는 순간이다. 장면 2 : 코로나가 전 세계로 무섭게 확산하던 2020년 상반기의 일이다. 저녁에 식구들과 거실에서 TV를 보던 중 뉴스에서는 미국의 쇼핑센터에서 사재기가 극성이며, 특히 두루마리 화장지를 확보하려고 사람들이 서로 주먹다짐까지 하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세계 최강국이며 선진국인 미국에서 사람들이 겨우 두루마리 화장지를 놓고 싸움까지 하다니, 나와 아내는 혀를 끌끌 찼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무심결에 ‘화장지가 없으면 신문지를 써도 될 텐데…’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때 내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곧이어 딸이 한마디 내뱉었다. “아니 어떻게, 아빠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렇다. 우리 아이들 역시 화장실에서 뒤처리할 때는 비데와 화장지 외에 해 본 적이 없다. 우리 아이들은 이미 선진국의 아이들이다. 어려서부터 집에 자가용이 있었고, 먹고 싶고, 하고 싶고, 가지고 싶은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었다. 아마 이 지구상의 한 시점과 한 장소에서 선진국의 아이들, 중진국의 부모들, 후진국의 조부모들이 공존하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세대 간의 간극이 쉽게 좁혀지지 않는 듯한데, 특히 노인 세대가 느끼는 정도는 더 심한 것 같다. 전쟁까지 겪고 피와 땀으로 조국의 산업화를 이루었지만, 지금은 사회에서 철저히 구조적으로 소외되고 있다. 사실 역사적으로 노인 세대의 소외라는 현상은 늘 있던 일이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예전에는 노인들의 삶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있었고 집안에서도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권위는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지금과 같은 4차 산업사회 환경에서는 노인들은 거의 디지털 문맹이므로 인터넷 또는 온라인상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드물다. 고작해야 휴대폰의 유튜브 채널로부터 편협된 세상과 만나는 것이 고작이다. 이제는 노인 세대를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펴야 한다. 개인에게 문제 해결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 사회는 걱정만 할 뿐이고 실효적인 대책은 없는 것 같다. 국가가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단지 금전적인 지원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노인들이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는 방안을 다각도로 찾고 이를 전 세대와 함께 풀어갈 해결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노인 문제를 전반적으로 관리할 국가 조직을 제안하는 바다. 최동군 지우학문화연구소 대표

[아침을 열면서] 유리창 너머 세상

가끔 대관령에서 생활하면서 비로소 유리창 너머의 세상이 보인다. 유리창 하나를 두고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온다는 말이겠다. 세상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진 덕이 아닐까. 그간 생활해 왔던 어디인들 유리창이 없었겠는가 싶지만, 늘 유리창 안에서 살았던 듯하다. 아니, 사실 제대로 의식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다 유리창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이곳 대관령 700고지에서 배워간다. 포슬포슬한 햇감자는 좋아하나 딱딱한 땅을 뒤집고 씨감자를 심는 일은 힘들어하고, 정부의 정책에 분노하지만 대안 제시에 게으르고, 학생들을 사랑하나 학업에 게으른 것 꾸짖음은 망설이며, 재난당한 사람들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선뜻 나서 작은 실천 하나 하지 못하는, 아니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남을 보며 나를 반성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는데, 나이 들어 조금씩 배워간다.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며 그 안의 나를 함께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이 육십이 될 때까지 세상과 대화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대화는 어떤 의미에서 일방적이었다. 설득하되 설득당하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그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었지만, 나 자신을 대상으로 함께 두고 살펴보지 못했으니 일방에 치우친 셈이다. 이제 자신과 차분히 대화할 때가 됐다. 그러면서 밖을 보니, 유리창이 보이기 시작했다. 밖과 안을 갈라 놓으면서 이어주는 유리창이.... 나뭇잎 떨어져 뒹굴고 수북이 쌓인 가랑잎을 밟으며 걷는 대관령 700고지 11월 창밖의 여백이 그렇게 다가왔다. 무려 열 달을 공들이다가 마지막 사력을 다해 피운, 꽃보다 붉은 단풍. 그러나 이내 떨어져 바람에 몸을 맡기는 가랑잎들은, 할 일을 다한 잎사귀의 득도인가. 옅은 바람에 갈색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11월, 지금까지 알던 사람들을 모르는 척 떠나는 발걸음이 아프다. 이태원 핼러윈 압사 참사 희생자의 영면을 빌면서 주말 아침 어김없이 ‘치유의 숲’에서 웅장한 전나무 길을 걷다 보니, 처음 만나는 들꽃들이 말을 건넨다. 안녕, 유리창 밖으로 나왔구나. 어떻게 바람 잦은 대관령까지 왔다니, 가을에도 꽃이 핀다. 단풍의 화려함에 치여 잘 보이지 않지만, 눈여겨보면 여기저기 많다. 눈에 보여야 말귀도 알아듣는 자세라면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 귀엔 들리지 않는 법이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고, 총체적 부실을 저질러 놓고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그들에게 사회 안전과 질서에 믿음을 다시 맡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치유의 숲 산책길에 고요함과 적막함에는 도시와 다른 질서와 아름다움이 있다. 허공이 있고, 바람이 있고, 울창한 나무가 있고, 바위도 있다. 그러나 전도유망(前途有望)한 많은 젊은이들을 지키지 못한 자책의 마음이 무겁고 발걸음도 힘겹다. 김근홍 강남대 교수·한독교육복지연구원장

[아침을 열면서] 길 위의 비극, 로드킬

몇 해 전 깊은 밤, 차를 몰고 한적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별안간 길섶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찰나의 순간, 어찌 손쓸 틈도 없이 그대로 들이받고 말았다. 한동안 운전대 잡기가 힘겨웠다. 충돌 당시 전해진 둔탁한 울림은 여전히 생생하다. 도로 위 많은 동물 주검을 지나치면서 설마 내가 사고를 내진 않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동물이 차량과 충돌해 죽거나 다치는 사고를 우리는 ‘로드킬’이라 부른다. 전국 도로 연장은 11만3천405㎞에 달하며 그 위를 2천507만대의 차량이 달린다. 거미줄처럼 얽힌 도로와 도로 사이사이에서 야생동물이 살아간다. 동물(動物)은 말 그대로 살아서 움직이는 존재다. 야생동물이 살아가려면 부단히 이동하며 먹이를 구하고 잠자리를 정하며 짝을 찾아다녀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간의 길을 건너 다닐 수 밖에 없다. 산과 산, 산과 들을 잇는 동물 길과 도시와 도시를 잇는 사람 길의 어긋난 만남, 비극의 시작이다. 해마다 우리나라 도로에서는 고라니 6만여마리를 비롯해 약 200만마리의 척추동물이 로드킬로 희생된다. 야생동물 개체군 존속과 생물다양성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어마어마하다. 사람의 안전 또한 위협받는다. 동물을 피하려다 도로를 이탈하거나 다른 차량과 충돌하는 등 인명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특히 요즘과 같은 가을철에 로드킬이 집중적으로 발생한다. 이즈음 희생되는 개체들은 대부분 올봄에 태어난 아성체다. 사람으로 따지면 질풍노도의 청소년기에 해당한다. 야생의 세계에서 포유류 새끼들은 어느 정도 자라나면 어미의 영역에서 벗어나야 한다. 더 이상 어미에게 있어 새끼는 자기 배 속에 품고 젖을 먹인 핏줄이 아니라 제한된 서식공간과 자원을 두고 다투어야 하는 경쟁자다. 바야흐로 가을이 되면 폭풍 성장한 새끼들은 어미 품을 떠나 새로운 서식지를 찾기 위한 대장정에 돌입한다. 이 과정에서 낯선 공간을 탐색하며 끊임없이 도로를 건너야만 한다. 어쩌면 야생동물에게 있어 혹독한 시련의 계절은 정작 겨울이 아닌 가을일 수 있다. 하늘은 높아지고 동면을 앞둔 야생동물은 살찌는 한편, 도로 위의 죽음은 늘어난다. 틀에 박힌 말이지만 로드킬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전방 주시와 규정속도 준수 등 안전운전이 우선이다. 주행 중 동물을 발견했을 때는 가급적 급정거나 갑작스러운 차선 변경을 자제해야 한다. 상향등을 끄고 속도를 서서히 줄이며 경적을 울려 동물이 도로 밖으로 벗어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도로 위 사체를 발견하면 도로관리기관에 신고하는 것이 좋다. 안전한 곳에 정차하고 정부 통합민원서비스 110으로 신고해 도로관리기관에 알려준다. 사체가 도로에 오랫동안 방치될 경우 이를 피하고자 자동차들의 곡예운전이 계속된다. 또한 사체를 뜯어먹기 위해 도로로 접근하는 동물들로 인한 2차 로드킬이 발생하기도 한다. 불운은 불운을 낳고, 죽음은 죽음을 몰고 온다. 정부는 해마다 로드킬 다발 구간을 중심으로 저감 조치를 시행하고 있지만, 다양한 도로 조건과 주변 여건으로 인해 도로 전 구간의 로드킬을 획기적으로 줄이기엔 역부족이다. 편리한 자동차라는 문명의 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계속 안고 가야 하는 문제라 가볍게 넘기기엔, 로드킬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가히 천문학적이다. 윤리적 측면, 국민안전, 국민정신건강, 자동차 수리비용, 생물다양성 감소 등 로드킬로 인한 피해는 다차원적이다. 로드킬 문제에 대한 꾸준한 사회적 관심과 지속적인 저감조치 확대가 필요한 이유다. 절정에 다다른 단풍잎만큼이나 붉디붉은 도로 위 선혈이 주는 의미를 되새겨 볼 때다. 눈부신 가을 날, 길 위에 선 모든 운전자와 뭇 생명의 안녕을 빈다. 우동걸 국립생태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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