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동작과 달콤한 한잔… 그안에 쓰디 쓴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칵테일의 진정한 유혹은 나의 입맛과 나의 취향에 맞춰 바뀌고 변하고 새로워질 수 있는 그 무한한 가능성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칵테일을 좋아한다.
단 한 잔만으로도 꽉 채워주는 듯한 칵테일을 좋아한다.
칼루아밀크나 블랙러시안처럼 레시피(recipe)가 간단한 칵테일은 종종 집에서도 직접 만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역시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것과는 천양지차라고나 할까.
이번 기회에 칵테일 만드는 법을 배워둔다면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흑심을 품고 바텐더(Bartender)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도전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바텐더의 길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바텐더는 클래식 바텐더(Classic Bartender), 플레어 바텐더(Flair Bartender), 믹솔로지스트 (Mixologist) 등으로 나뉜다. 클래식 바텐더는 가장 기본적인 클래식 바의 바텐더로 ‘바의 신사’라고 불린다.
플레어 바텐더는 병을 던지고 돌리고 다양하고 현란한 쇼를 보여주면서 칵테일을 만드는 바텐더로 만능엔터테이너다. 믹솔로지스트는 ‘섞다’는 뜻의 믹스(Mix)와 ‘학자’라는 뜻의 올로지스트(Ologist)의 합성어다. 새로운 칵테일을 만들고 연구하는 바텐더라는 의미로 칵테일의 연금술사라는 별칭도 얻고 있다. 고객이 원하는 특별한 칵테일을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신비로운(?) 능력의 소유자다.
바텐더가 되기까지의 길도 험난하다. 바텐더의 기본소양은 스스로 레시피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해진 레시피를 따라서 칵테일을 만드는 사람은 바텐더가 아니다.
서울의 강남이나 이태원, 압구정동도 아닌 인천에서 정통한 바텐더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지만, 하늘의 도움인지 송도국제도시에서 신개념 일렉트로닉 라운지클럽인 칵테일바 ‘인밥(INBOB)’을 찾아냈다.
인밥의 캡틴이자 15년차 베테랑인 바텐더 칼(본명 안효식·34)은 무모하게 바텐더에 도전하려는 기자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줬다.
■바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1년
23일 오후 5시, 영업시간 전에 인밥을 찾았다. 인밥이 무슨 뜻일까 궁금했는데 ‘인디언밥’을 줄인 거라고 했다. 어릴 적 놀이처럼 즐겁고 편한 공간이라는 사장님의 심오한 뜻이 담긴 이름이란다.
인밥에 들어서니 화이트톤으로 멋을 낸 라운지와 색색의 칵테일 재료들이 담긴 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바가 한눈에 들어왔다. ‘오늘 내가 칵테일을 배울 곳이 바로 여기구나’라는 생각에 인사를 건네며 바 안으로 들어서려고 했더니 캡틴이 단호한 목소리로 제지한다.
바 안은 감히 초보가 첫날부터 넘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캡틴은 19살의 나이에 바텐더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서울 압구정동의 유명한 칵테일바를 찾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무려 11개월 동안 바 안에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했단다. 매장에서 맥주박스 나르면서 허드렛일을 한 뒤에야 바 안에 들어설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고 했다.
하지만 바 안에서도 당시 캡틴에게 주어진 일은 설거지와 뒷정리뿐. 6개월을 더 기다려서야 비로소 바텐더로서 첫걸음을 뗄 수 있었다.
무려 17개월을 기다린 끝에 얻은 기회이다. 지금은 수습기간 3개월, 트레이닝 3개월도 많이 단축됐다고 한다.
그렇지만 캡틴처럼 바 밖에서 몇 개월씩 기다릴 수 없는 처지라 라운지를 깨끗하게 쓸고 닦고 하는 것으로 간신히 1단계를 통과할 수 있었다.
바 안으로 들어서기 전 복장점검도 해야 했다.
바텐더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검은색 조끼에 맞춰 검은색 또는 흰색 셔츠를 입는 게 기본규칙이었다.
바 안쪽 바닥에는 병이나 유리잔이 떨어지더라도 깨지지 않도록 완충재를 깔아뒀기 때문에 구두를 신고는 걷기가 힘겨웠다.
칵테일 레시피를 배우기 전에 칵테일을 만들 때 필수과정인 쉐이킹(Shaking)을 배웠다.
쉐이커에 얼음과 재료를 넣고 유리컵을 뚜껑처럼 빈틈없이 꽉 닫은 다음 흔들기. 10~15회가량 흔들면 재료와 얼음이 잘 섞인다. 쉐이커는 열전도율이 높아서 금세 차가워진다. 쉬운 작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손이 시려서 15회를 채우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흔들 때는 손목을 이용해 부드럽게 흔들어야 한다. 팔 전체를 흔들면 쉽게 지치고 실수하면 쉐이커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
다 섞인 쉐이커는 한쪽을 ‘탁’ 소리가 나도록 쳐주면 유리컵과 쉽게 분리할 수 있다. ‘작은 것 하나에도 오랜 경험에서 나온 요령이 있구나’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칵테일의 오묘한 매력
어떤 칵테일을 배워볼까 고심하다가 처음부터 욕심을 좀 내봤다.
‘드림로즈’
미국에서 개발하다가 실패한 장미의 이름은 본뜬 칵테일이라고 들었는데 색이 무지갯빛에 가깝다.
첫맛은 상큼하고 시원한 느낌이고 끝 맛은 달곰하고 부드럽다.
드림로즈는 층층이 색이 어우러지도록 만들어야 하는 최고 난이도 칵테일이다. 결국 초보는 손을 놓고 작품(?)의 완성도를 갖추고자 캡틴이 만드는 것을 어깨너머로 견학만 했다.
얼마나 실력을 쌓아야 이렇게 아름다운 빛깔의 칵테일을 만들 수 있게 될지 부럽고 존경심이 솟아났다.
다음으로 배운 칵테일은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 일명 ‘롱티’
일반적으로 칵테일은 베이스로 진, 보드카, 럼 등 1가지를 선택해 부재료를 넣지만 롱티는 진, 보드카, 럼 3가지를 모두 섞는 특이한 칵테일이다. 어떤 경우에는 데낄라까지 넣기도 한단다.
이외에도 트리플 섹, 샤워믹스(레몬주스), 콜라 등 재료도 많이 들어간다.
트리플 섹은 주정(spirit)에 오렌지 껍질 등을 넣고 만든 리큐르 중 하나다.
진이나 보드카, 럼, 트리플 섹 모두 알코올 도수가 40% 이상이라 칵테일 도수도 30%를 넘는다.
롱티는 신기하게도 홍차를 전혀 넣지 않고 홍차와 비슷한 맛을 낸다. 그래서 이름에도 홍차(Tea)가 들어간다.
시범을 보여주는 캡틴은 계량컵인 지커(Gigger)를 전혀 쓰지 않고 병을 한 번 들었다 놓는 프리 푸어(Free Pour)로 양을 딱딱 맞추면서 초보의 기를 팍팍 죽였다.
주눅이 든 초보가 가여웠는지 캡틴은 “레시피대로만 하면 된다”고 격려해줬다.
다행히 초보가 계량컵을 이용해 만든 롱티는 맛을 흉내 낼 정도의 수준은 됐다.
칵테일은 매우 세심한 술이다. 재료의 양이 조금만 달라져도 맛이 미묘하게 변한다. 그래서 같은 롱티라도 누구나 취향과 기호에 맞게 바꿀 수 있다. 더 독하게 혹은 더 달콤하게.
칵테일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프랑스어 코크티에(Coquetier)에서 시작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1795년경 미국 루이지애나주(州) 뉴올리언스에 이주해온 A.A.페이쇼라는 약사가 달걀노른자를 넣은 음료를 조합해서 코크티에라고 부른 게 시초라고 한다.
미국뿐만 아니라 인도나 페르시아에서 예로부터 펀치(punch)라는 혼성 음료를 만들어 마시던 것이 에스파냐, 서인도, 유럽으로 전해졌다는 기록도 있다. 1700년대 영국의 육군대령 F.니거스가 양주를 배합해 혼성 음료를 발명하고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는 설도 있다.
칵테일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이라고 한다. 미국에 금주령이 내렸을 때 바텐더들이 유럽으로 건너가 여러 종류의 칵테일을 만들면서 번져나갔다.
칵테일이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은 누구든 한번 맛본다면 잊기 어려운 칵테일만의 매력이 전 세계적으로 통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상냥한 막대기, 바텐더
최근 흥미있게 읽었던 만화 바텐더(Bartener)에서는 바텐더라는 말을 바(Bar)+텐더(Tender)로 나눠 해석했다.
막대기를 뜻하는 바(Bar)와 부드러운(Tender) 이라는 말을 섞어 ‘부드러운, 상냥한 막대기’라고 설명했다.
긴 막대기 형태의 바를 지키면서 항상 막대기처럼 꼿꼿하고 바른 자세를 한 바텐더, 바에 앉은 고객은 그 누구라도 속내를 들어주고 귀를 기울여주는 바텐더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원래 바텐더의 뜻은 바(Bar)를 돌보는(Tend) 사람(er)이라는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상냥한 막대기라는 표현이 바텐더를 더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캡틴에게 왜 바텐더라는 직업을 택했는지 물었다.
캡틴은 “술을 사랑했다”라면서 농담으로 말을 시작했지만, 곧 “사람들을 만나서 술 한잔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속의 응어리를 풀어내도록 돕는다는 게 멋진 일 같았다”고 진지하게 답해줬다.
캡틴의 시작은 플레어 바텐더였다. 화려하게 병을 돌리고 불을 뿜는 기술을 연마했다.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일도 많았다.
하지만 바텐더에게 술 만드는 것은 두 번째, 사람과의 소통이 첫 번째라는 걸 깨닫게 됐다고 한다.
인밥에서 기자와 만난 병아리 동지 지오(닉네임·29)도 플레어 바텐더를 꿈꾸는 청년이다.
캡틴에게 함께 구박을 받으면서 칵테일을 배웠지만 지오는 항상 웃는 얼굴을 잃지 않았다. 칵테일을 만들고, 즐겁게 무대(바)를 꾸미고, 사람들이 호응해주는 걸 느끼고 싶은 소박한 소망이 있는 긍정 청년이었다.
캡틴은 칵테일 맛있다고 리필(Refill) 해달라고 할 때란다. 칵테일이 리필이 될 리 없지만 그 정도로 손님이 칵테일에 만족했다는 뜻이니 정말 리필이라도 해주고 싶다고 했다.
칵테일은 어쩌면 가장 모순된 음료가 아닐까 싶다.
독하지만 독한 맛은 아니고 달콤하지만 무턱대고 마시면 정신 줄 놓게 될 만큼 독주(毒酒)다.
칵테일이 오랜 세월 매력을 잃지 않고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칵테일 한 잔을 권해주고 내 앞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냥한 막대기, 바텐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미경 기자 kmk@kyeonggi.com
사진=장용준 기자 jyjun68@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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