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대목 성남 모란시장
먹거리·볼거리 없는 게 없고 ‘푸근한 인심’ 추운 줄도 몰라
그런데 유달리 평일 낮에도 만원 버스가 되는 날이 있다. 바로 경기지역 최대 민속 5일장인 성남 모란장이 열릴 때다.
설을 앞둔 4일 모란장이 열렸다. 희끗희끗한 머리 위에 두툼한 갈색 털모자를 쓰고 버스에 오른 강정이 할머니(71)를 만났다. 예상대로 모란장에 가는 길이란다. “모란장에 가면 어렸을 때 뛰놀던 그 시장이 생각나. 사람도 북적북적하니 보기만 해도 얼마나 재밌는데”라고 말하는 강 할머니의 얼굴에 소녀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매달 ‘4’와 ‘9’가 들어가는 날 열리는 모란장에는 정말 없는 게 없다. 시장 초입에 위치한 채소, 수산물 점포를 지나 각종 공산품을 파는 곳에 가보니 요즘은 보기 힘든, 20여년 전에나 유행했던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재생기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옆에는 USB를 꼽아 음악을 듣고 영상을 보는 최신 PMP가 진열돼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지글지글 맛있는 전과 얼큰한 장터국밥이 마련된 장터식당과 알록달록한 몸빼바지를 파는 옷가게를 지나 모란장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니 힘찬 움직임을 보이는 닭과 개, 병아리, 꿩이 저마다 사연을 안고 손님을 맞이했다. 싱싱하고 질 좋은 먹을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수없이 오가는 손길 속에 정이 듬뿍 담긴 덤은 두말하면 입이 아프다. 옹기종기 모여 종종걸음을 걷는 사람들 속에 동장군의 차디찬 칼바람은 갈 길을 잃었다.
길 양옆으로 좌판이 깔렸다. 목청 좋은 상인들의 “골라 골라” 하는 호객행위가 발걸음을 붙잡는다. 10년째 모란장에 나와 구두와 벨트 등 잡화를 팔고 있는 김진화씨(53)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다 보면 추위도 싹 가신다는 김씨는 “설 대목이라 그런지 장을 찾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다”며 “몰려드는 사람들 모습만 봐도 배가 불러서 점심도 안 먹었다”고 너털웃음을 짓는다.
이제는 성남을 넘어 수원, 용인, 안양 등 주변 도시는 물론 멀리 충청도나 경상도에서도 사람들이 찾을 정도로 모란장은 전국구급 시장으로 발돋움했다.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을 데리고 청주에서 모란장을 찾은 신미현씨(42)는 “명절도 가까워 어릴적 생각을 하면서 아이에게 추억거리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여행 삼아 장을 찾았다”면서 “예전만큼 푸근한 인심이 그대로 느껴져 참 따뜻하다”고 말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자 하나둘씩 장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설이 다가와서일까, 오늘의 장은 평소보다 더 뜨거운 기운을 머금고 하루를 끝마쳤다.
시장의 ‘장(場)’ 자를 풀어보면 ‘해가 비추는 땅’을 말한다. 땅을 의미하는 ‘흙 토(土)’와 햇볕을 의미하는 ‘볕 양()’ 두 글자가 더해졌다. 그래서인지 우리네 장은 언제나 따뜻하다. 시샘 가득한 동장군이 차디찬 바람을 몰고 왔지만, 장은 굴하지 않고 같은 자리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오랜 만에 만나는 가족과 친척들, 바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희망찬 마음으로 맞이하는 새해. 장이 뿜어내는 열기에 동장군은 슬며시 자리를 피한다. ‘설을 품은 장’은 지금 이 시간에도 활짝 문을 열어놓고 있다.
이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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