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욱하여라
- 백무산
삽 한 자루 들고
들판 나섰다가
소낙비 만났다
나무처럼 젖어 자욱한 빗속 걸으니
웃음이 난다 머물 곳 없어
그칠 수 없이 웃음이 난다
난데없어라
삶이 문득 난데없어라
트인 들판에
나의 생도 감출 곳 없어
툭 트여 난데없어라
난데없는 것 난 곳 없어라
자욱하여라 들판인가 나인가
난데없이 자욱하여라
웹진 《시인광장》, 2007년 가을호
기개와 결기가 없는 시대는 옹색하다. 비좁고 답답하다. 대의(大義)는 뒷전에 두고 생활의 염려만을 앞세우다보니 단 한번뿐인 삶이 온통 궁핍의 얼룩이다. 그래서 뭘 해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흐린 생각만 안개처럼 자욱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패배의 빛깔을 띤 듯한 물음이지만 궁핍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한번은 품어야 마땅할 질문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확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애꿎게 속만 상하던 즈음에 백무산 시인의 시 <자욱하여라>를 ‘난데없이’ 만나게 되었다. 그 ‘난데없음’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까마득한 물음의 출처를 알 수 있게 만들어 주었기에 반갑고, 또 반가웠다.
갑자기 불쑥 나타나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음을 뜻하는 ‘난데없음’과 연기나 안개 따위가 잔뜩 끼어 흐릿함을 뜻하는 ‘자욱함’의 정조(情操)가 짙게 깔린 시는 일견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불확실함의 불안 심리를 표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 시를 두세 번 거듭거듭 읽다보면 마음 안쪽에서부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확연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 기운이란 바로 단단하고 힘찬 ‘기개(氣槪)’일 것이다. ‘삽 한 자루’를 들고 ‘들판’을 나서는 화자의 모습에서 나는 이육사 시인의 시 <광야>에 나오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의 모습을 떠올린다. “나무처럼 젖어 자욱한 빗속”을 거닐면서 그칠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사방이 트인 ‘들판’에서 “나의 생도 감출 곳 없어/툭 트여 난데없어라”라고 외치는 모습은 너무도 결연하다. 내가 들판인지 들판이 나인지 모를 혼연일체의 고양된 감정을 “난데없이 자욱하여라”는 말로 드러냄으로써 현실의 궁핍과 왜소를 넘어서려는 의지를 확고히 천명하는 백무산의 <자욱하여라>는 사소함의 감정에 매몰된 작금의 이런저런 시들과는 분명한 차별을 보인다. 그래서 마음에 깊게 남는다.
왜소함은 긍지의 결핍이다. 긍지는 자신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당당함이다. 사방이 툭 트여 난데없음을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당당함의 기개일 것이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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