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손
- 최승자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 주는 가여운 안식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 주는 가여운 평화
『이 時代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그의 부인인 엘리자베트 벡(Elisabeth Beck)과 함께 쓴 <사랑은 지독한 혼란-그러나 너무 정상적인>에서 “사랑은 쾌락, 신뢰, 애정이며 이와 동시에 분명히 그와 정반대의 것, 즉 권태, 분노, 습관, 배신, 외로움, 위협, 절망 그리고 쓴 웃음이기도 하다”라고 주장한다. 그의 말 중에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이 ‘동시에’라는 표현이다. 그 표현의 맥락을 짚어보자면, 사랑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그 ‘결과’로 분노가 유발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사랑엔 배신과 외로움과 절망 같은 ‘반대의 것’들이 담겨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울리히 벡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사랑의 역설’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믿기지 않는 말을 상대에게 진지하게, 나아가 서슴없이 던지게 되는 것 같다.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기에 사랑의 정체(正體)는 알 수 없게 되고, 그로인해 애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아프고 쓸쓸해진다. 사랑의 문턱을 넘나들며 신뢰의 끈을 자르려는 돌발의 사태들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피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는 사태,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위협하고, 절망하면서도 상대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연민의 애틋함. 그것이 사랑의 역설이고, 믿고 싶지 않는 사랑의 불가능성이다. 최승자 시인의 <사랑하는 손>은 사랑의 알 수 없음과 지극한 연민의 감정 그 어디쯤에 걸쳐있는 쓸쓸함의 정서를 ‘거기’라는 장소에 담아낸다. 시인이 말하는 ‘거기’는 가깝지만 먼 곳처럼 느껴진다. 알 것 같지만 알 수 없는 ‘비’만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거기’는 사랑의 불가능성과 연민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즐거움보다 ‘가여운 안식’이 압도하고, 서로의 손을 잡아도 “열 손가락에 걸리는 쓸쓸함”만 느껴지는 ‘거기’는 비에 젖어 차갑게만 보인다. 사랑의 열정도 식고, 손의 온기도 식어서 그저 쓸쓸함만 맴도는 ‘가여운 평화’의 시간. 그 형용모순의 시간이 바로 우리가 체감하고 마주치는 사랑의 현실일 것이다.
최승자 시인의 <사랑하는 손>은 쓸쓸하고 적막하다. 나는 그 쓸쓸함의 적막에서 사랑의 맥박을 느낀다. 사랑하는 이의 손에서 느껴지는 ‘가여운 안식’과 ‘가여운 평화’의 반대편에 있을 또 다른 사랑의 맥박을 말이다. 사랑은 정반대의 것들을 품고 있다는 울리히 벡의 주장은 가능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형용모순의 시간이 없는 사랑은 권태의 천국일 뿐이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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