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이문재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2014
좋은 노래도 세 번 들으면 귀가 싫어한다는 속담이 있다. 그뿐만 아니다. 칭찬도 자주 하면 욕이 된다고들 한다. 욕이든 칭찬이든 반복되는 것들은 지겨움을 준다. 왜 그럴까?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이를 생산하지 못하는 반복은 지겹다. 잔소리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대부분이 그렇다. 의미를 생산하는, 즉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은 집중하게 되고 몰입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운동에 중독되는 것이 그런 경우다. 역기를 드는 행동의 반복은 근육의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지겹지 않다. 좋은 습관들의 반복이란 이렇듯 차이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만약 반복이 죽음을 가져온다면, 구원과 치유를 가져오는 것, 또 무엇보다 반복을 치유하는 것도 역시 반복”(차이와 반복, 민음사)이라는 말로 반복에 내재한 긍정성과 부정성의 계기를 설명했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은 육체와 정신의 근육을 만들어내는 의식의 활동성이다. 차이가 없는 반복은 의식의 정지이며, 죽음이다. 반복이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곧 사유의 종언(終焉)을 뜻한다.
단순한 것들의 반복이 화려한 수사보다 더 큰 울림을 줄 때가 있다. 이문재 시인의 「사막」이 그러하다. 그의 시는 ‘사막’, ‘모래’, ‘사이’라는 명사와 ‘많다’라는 서술어의 반복이 내용 대부분을 구성한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반복이지만 지겹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 시를 처음 읽을 때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건 ‘사막’에는 ‘모래’보다 더 많은 게 ‘모래와 모래의 사이’라는 시인의 사유와 성찰이다. 그것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사이’, 즉 관계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 독자들의 자연스런 감상이다. ‘사이’라는 것이 갖는 실존적 의미는 여러 층위로 작용한다. 메울 수 없는 ‘차이’ 일수도 있고, 소통의 ‘통로’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차이들이 있기 때문에 소통할 수 있다는 역설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한 성찰을 시인은 “모래와 모래 사이에/사이가 더 많아서/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라는 진술로 드러낸다. 모래들의 합(合)보다 ‘사이’가 더 많다는 것은 모든 관계를 수량화하고 계측화하는 근대의 실용주의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다. 사이는 차이를 만들어내고, 차이는 끊임없이 갈라지고 반복되면서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러한 과정의 반복이 삶의 본질이고, 유구함이다. 그래서 “오래된 일이다.”라는 마지막 표현이 가슴에 묵직하게 남는다.
우리는 ‘사이’를 산(生)다. 사이를 사는 것은 중간에 머무는 게 아니다. 나와 너, 이곳과 저곳 사이를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다. 사이와 사이를 ‘유랑’하는 차이와 반복의 시간이 사랑이고, 삶이고, 자유다.
신종호 시인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