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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나날들
문화 시 읽어주는 남자

[시 읽어주는 남자] 나날들

나날들

                                 심보선

우리는 초대장 없이 같은 숲에 모여들었다. 봄에는 나무들을 이리저리 옮겨 심어 시절의 문란을 풍미했고 여름에는 말과 과실을 바꿔 침묵이 동그랗게 잘 여물도록 했다. 가을에는 최선을 다해 혼기(婚期)로부터 달아났으며 겨울에는 인간의 발자국 아닌 것들이 난수표처럼 찍힌 눈밭을 헤맸다. 밤마다 각자의 사타구니에서 갓 구운 달빛을 꺼내 자랑하던 우리. 다시는 볼 수 없을 처녀 총각으로 헤어진 우리. 세월은 흐르고, 엽서 속 글자 수는 줄어들고, 불운과 행운의 차이는 사라져갔다. 이제 우리는 지친 노새처럼 노변에 앉아 쉬고 있다. 청춘을 제외한 나머지 생에 대해 우리는 너무 불충실하였다. 우리는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서만 안심한다. 이 세상에 없는 숲의 나날들을 그리워하며.

 

『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지성사, 2011.

나무들처럼 각자의 ‘나날’을 산다

서초동 대법원 앞 도로 한가운데 수령이 무려 800년이 넘은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이 나무는 갖은 소음과 매연을 견디며 지금껏 살아있다. 장대하고, 경이롭지만 한편 쓸쓸해 보인다. 숲을 떠난 나무의 삶은 어떠할까?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기울어가는 노목(老木)의 몸을 받쳐주는 철제 버팀목이 대신하여 답을 하는 듯하다. 심보선 시인의 시 ?나날들?을 읽으며 향나무의 ‘나날들’과 내가 살아온 ‘나날들’의 면면을 돌아본다. 나날의 반복과 계절의 순환이 빚어내는 세월의 단호한 흐름 앞에서 우리의 삶은 왜소하다. “초대장 없이 같은 숲”에 모여든 것처럼, 우리는 우연들의 겹침으로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나무들처럼 각자의 ‘나날을’ 산다.

문란을 풍미하는 봄의 열정과 과일처럼 여문 침묵의 여름, 그리고 혼기로부터 달아나는 가을과 인간의 발자국이 없는 눈밭을 헤매는 겨울의 시간이란 시인의 내밀한 경험이 담긴 삶의 흐름과 열정을 사계(四季)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경험의 내용은 다르겠지만 우리는 시간 앞에서 동일하다. 다 같이 소진(消盡)하는 삶을 산다. 방황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자랑하며 사는 게 ‘숲’으로 상징화된 인간 삶의 모습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사라진다고 숲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내가 없어도 삶은 지속된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허무를 느낀다. 할 말도 점차 사라지고, ‘지친 노새’처럼 노변에 앉아 쉬고 있는 소진의 시간은 무력해 보인다. 그래서 시인은 “청춘을 제외한 나머지 생에 대해 우리는 너무 불충실”했다는 회한과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서만 안심”한다는 동경을 내비친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표현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한껏 소진하며 살기에 숲의 시간은 아름답다. 그래서 “이 세상에 없는 숲의 나날”은 “이 세상에 있는 숲의 나날”로 새로 읽히기도 한다.

삶은 능동적 소진이다. 소진하지 않은 ‘나날들’은 후회의 연속일 뿐이다. 서초동 대법원 앞이 소나무가 쓸쓸해 보이는 이유는 숲의 시간, 즉 서로 부대끼고 흐느끼는 소진과 사랑의 시간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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