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린체가 동족을 외면하고 정복자에게 협력한 이유는 자신의 비참한 기억뿐만 아니라 동족과 고향까지 말끔히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료적 논란은 있지만, 그녀는 코르테스의 정부가 돼 인디오 여인과 에스파냐 백인 피가 섞인 최초의 메스티소(Mestizo)인 혼혈아 마르틴(Martin)을 낳았다.
출산 후 둘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코르테스는 정복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언어적 재능이 뛰어난 말린체를 이용했고, 그녀를 정부로 삼아 한동안 옆에 두었을 뿐이다. 코르테스는 정복이 어느 정도 마무리돼 그녀의 역할이 줄어들자, 말린체는 그에게 더는 필요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
20세기 멕시코 벽화 운동의 거장 오로코스가 1926년에 그린 <코르테스와 말린체>라는 작품에서 두 사람은 어색하게 두 손을 마주잡고 앉아 있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마르틴은 발아래 누워있다. 아들을 외면한 채 말린체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모습은 당시 에스파냐 지배 하에서 신음하는 멕시코를 표현했다고 한다.
에스파냐어로 ‘섞인다’라는 뜻을 가진 메스티소는 이제 멕시코의 진정한 주인이 됐고, 말린체는 ‘겁탈당한 여인’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와 함께 ‘건국의 어머니’라는 역설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게 됐다. 말린체는 코르테스의 아들 마르틴을 낳음으로써 최초로 메스티소의 어머니가 됐고, 코르테스는 메스티소의 탄생과 생물학적으로 새로운 종족 형성을 상징하는 최초의 인물이 됐다. 따라서 멕시코인들은 좋든 싫든 마르틴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정해야만 하지 않을까.
박태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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