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푸르름의 시간
잔디밭 위로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흐른다. 세상이 분주하게 돌아가는 동안 이 풍경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고요 속에서 마음은 비로소 제 속도를 되찾는다. 삶도 이처럼 때로는 멈춰 서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푸르름은 단지 자연의 색이 아니다. 그것은 기다림이며, 성장이고, 조용한 회복이다.
#2. 황혼의 속삭임
저녁은 언제나 조용한 질문처럼 다가온다. 하루를 묻고, 삶의 무게를 어루만진다.
누군가는 끝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어둠의 시작이라 말하지만, 내게 저녁은 빛이 마지막으로 세상을 쓰다듬고 가는 시간이다. 도시는 여전히 분주하지만 황혼의 틈에서 들리는 속마음 소리. 그것이 저녁이 건네는 은밀한 선물이다. 전선 위를 걷는 빛은 하루의 피로를 위로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조용한 다짐이다.
#3. 틈, 스스로 피어나는 것들
틈, 잊힌 자리에서 한 송이 능소화가 조용히 얼굴을 내밀었다. 무심한 듯 청명한 하늘 아래, 생명의 빛깔은 담장 너머로 살짝 번져 나왔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아도, 아무도 기대하지 않아도 스스로 피어나는 꽃 한 송이.
삶이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시선도, 허락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를 향해 피어나는 찰나의 빛.
낡고 거칠어진 시간의 표면 위에서 우리는 언젠가 그렇게, 소리 없이 피어나는 존재인지도. 오늘, 우연히 마주친 — 이 벽 위의 꽃처럼.
#4. 오르는 숲길에서
숲은 말없이 길을 낸다.
햇살 한 조각, 나뭇잎 그림자, 발끝에
닿는 흙의 감촉,
모든 것이 조용히 나를 이끈다.
오르는 길은 가파르면서도 가볍지 않다.
묵묵히 쌓인 시간처럼,
이끼 낀 계단 하나하나가 숲의 숨결을
품고 있다.
무엇이 나를 이 길로 이끄는가.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가.
숲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 자신에게 닿는다.
발걸음이 무거울수록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진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오르는 숲길에 나를 놓아둔다. 홍채원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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