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발이 닿지 않는 물속을 헤매듯, 어딘지도 모를 낯선 공간을 정처 없이 헤매는 이들이 있다. 때론 역사에 따라, 때론 기억에 의해 자신의 존재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채 정체성의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어버린 이들을 다룬 소설을 소개한다.
■ ‘벌집과 꿀’ (폴 윤, 엘리 刊)
전쟁, 탈북, 강제 이주 등 역사의 아픔은 개인의 삶에 상흔을 남겼고, 누군가는 어디론가 계속 떠나야 했다. 어떠한 연유로 지금의 땅에 도착했는지,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으로 도망쳤는지 알지 못한 채 낯선 풍경에 던져진 이들을 가장 괴롭게 한 건 스스로에 대해서조차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소설 ‘벌집과 꿀’은 광활한 시공간으로 흩어진 한국계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를 다룬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상상력은 작가 특유의 시적인 글로 표현됐다.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를 의미하는 ‘디아스포라’는 작가 ‘폴 윤’의 오랜 주제다.
‘정체성’을 중심으로 미국 문학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인 그는 이주민 가정에서 자라난 한국계 미국인이다. 탈북한 피난민인 조부와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곳곳을 옮겨 다니면서도 가족으로부터 자신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시간은 어딘가 연결되고, 소속되고자 하는 갈망으로 탄생했다. 그는 첫 장편소설 ‘스노우 헌터스’(2013)로 뉴욕 공공도서관 영 라이언스 픽션 어워드를 수상, ‘벌집과 꿀’은 스토리상 수상 및 ‘타임’, ‘뉴요커’ 등 유수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꼽히기도 했다.
총 7편의 단편이 수록된 작품엔 19세기 연해주의 고려인 정착지, 한국전쟁 직후 남한의 외딴 산골을 거쳐 현대의 미국과 영국 등 광활한 시공간에서 고립되고 단절된 이들을 다룬다. 탈북한 한국인 2세로 런던에서 살아가는 부부, 러시아 극동 지방의 척박한 고려인 이주지에 임관한 장교, 사할린섬의 교도소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찾아 나선 십 대 소년 등 역사 위 개인이 자리 잡고 있다. 깊은 감정과 복잡한 역사는 담백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로 절제의 미를 더한다.
이들은 그럼에도 ‘벌집’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찾아 나선다. 짧은 순간이라도 서로 연결되고, 이방인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땅과 곁을 내어주는 이들을 그리며 작가는 생면부지의 타인을 돌보는 건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본능이라고 말한다. 조금 덜 폭력적이고 보드라운 미지의 세계, 벌집과 꿀이 있는 곳을 향해 서로를 잡아주고 집이 돼주며 길을 만든다.
■ ‘쌈리의 뼈’ (조영주, 빚은책들 刊)
“기억이 존재한다면 사실일까, 아니면 사실이기에 기억되는 걸까?” 소설 ‘쌈리의 뼈’를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했다. ‘치매’라는 현실 소재와 실제 장소에 가미된 허구의 상상력을 통해 작가는 ‘기억’의 불완전함에서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작품은 치매에 걸린 엄마의 혼란스러운 기억과 이를 쫓는 딸의 위태로운 심리를 따라가는 심리 스릴러이다. ‘치매’라는 현실적인 소재와 ‘추리’ 장르의 만남이 특별하다.
작품은 잊힌 공간 ‘쌈리’를 배경으로 한다. ‘윤명자’는 한 때 잘나가는 밀리언셀러 작가였지만 치매가 진행되며 기억과 현실을 혼동한다. 과거 평택역 인근 집창촌 ‘쌈리’를 배경으로 한 소설 ‘쌈리의 뼈’를 쓰던 중 병을 얻은 윤명자는, 딸 ‘해환’에게 원고를 이어 써달라고 부탁한다.
어느 날, 편집자로부터 ‘쌈리에서 진짜 뼈가 나왔다’는 전화가 온다. 해환은 엄마의 흔적을 뒤쫓으며 소설 속 인물과 실제 사건 사이의 경계를 탐색한다. 엄마가 남긴 소설이 진짜인지 아니면 허구에 불과할지, 살인은 실제인지 의심은 더해가고 심지어 해환은 자신의 기억마저 의심하는 일들을 겪는다.
장편소설 ‘쌈리의 뼈’는 작가 조영주의 ‘시간’ 3부작 중 마지막이다. 앞선 소설 ‘크로노토피아’에선 무한의 시간을, ‘은달이 뜨던 밤 죽기로 했다’에선 찰나의 시간을 다룬 그는 이번엔 상실의 시간을 다루고 싶었다고 말한다. 작가는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이자 실제 장소를 기반으로 허구를 덧입히며 제3의 시공간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장강명 작가는 작품에 관해 “잘 쓴 심리 스릴러이자 흥미진진한 추리물 이상”이라며 “죄는 끝끝내 상속인을 찾는다”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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