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일찬 말이되는연구소 대표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를 둘러싼 갈등은 단순한 노선 다툼이 아니다. 김포와 하남시민들의 외침은 “불편하다”는 푸념이 아니라 오랜 배제와 박탈의 기억이 응축된 언어다. 철도는 이제 교통망을 넘어 도시의 존엄과 권리를 가르는 민주주의의 시험대가 되고 있다.
김포 인구는 2015년 35만명에서 2024년 48만명으로 37% 늘었지만 서울 직결 교통망은 제자리였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김포시민의 평균 통근시간은 수도권 평균보다 25분 길고 출근 시간대 만차율은 120%를 웃돈다. 하남도 인구 30만명을 돌파했지만 광역 인프라는 늘 늦었다. 지친 시민들이 정치인에게 “너도 한번 타봐라”라며 던진 챌린지는 풍자가 아니라 분노와 냉소가 결합된 집단 정체성의 발현이었다.
정부는 “AI 데이터로 최적 노선을 설계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데이터는 지도를 그려줄 수는 있어도 동의를 확보해주지는 못한다. 효율은 설득을 대신할 수 없다. 국가 예비타당성조사와 갈등관리 연구는 이미 여러 차례 경고해 왔다. 숙의 없는 결정은 지연과 재설계, 소송으로 이어지며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위례신사선 경전철의 경우 주민 반발로 공정이 멈춰 수년이 지체됐고 그 과정에서 추가 재정 부담도 불어났다. 반대로 초기 3개월의 숙의는 3년짜리 재설계를 줄인다. 참여는 지연이 아니라 절감이다.
GTX 갈등은 단선적이지 않다. 소외된 도시는 분노하고, 수혜 도시는 집값 급등과 임대료 불안에 흔들리며, 경유 도시는 개발 압력에 지친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GTX 예정지 일부 역세권은 최근 3년간 20~30%의 가격 상승률을 기록했다. 일부 수혜 지역은 역세권 과열과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원주민이 밀려나는 역설을 겪고 있다. 부천, 의정부, 용인 같은 경유 도시는 “또 주변부로 밀려난다”며 불만을 터뜨린다. 분노·불안·피로가 교차하는 풍경, 이것이 GTX 갈등의 본질이다.
해외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일본 신칸센에서 제외된 지역은 수십년째 “버려졌다”는 감정을 토로한다. 프랑스에서는 TGV 노선에서 빠진 도시가 ‘2등 시민’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프랑스는 제도로 대응했다. 1995년 ‘바르니에법’으로 설립된 국가공론위원회(CNDP)는 대형 인프라 사업에 공론 절차를 의무화했다. 사업자는 정보를 시민에게 공개해야 하고 정부는 제기된 쟁점에 답해야 한다. CNDP는 매년 수십건의 공론 절차를 운영하며 실효성을 입증하고 있다. 영국 HS2, 독일 슈투트가르트21도 시민 공론화를 통해 갈등을 흡수했다. 신뢰는 결과가 아니라 절차에서 비롯된다.
우리도 절차로 신뢰를 세워야 한다. 무작위 추첨으로 구성된 시민배심원단, 주민·전문가·시민단체가 함께하는 상설 협의체, 지역별 투자 격차를 수치화한 공정성 지표가 필요하다. 최근 5년간 수도권 광역교통망 투자액의 절반 이상이 서울·강남권에 집중됐다는 국토부 자료는 왜 소외지역의 불만이 폭발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공정성 지표는 ‘도어 투 도어 평균 통근시간 단축률’과 ‘대중교통 접근성 개선 폭’을 수치화해 공개하는 방식이다. 효율과 공정이라는 두 바퀴가 함께 굴러야 신뢰가 선다.
이 제도는 실행도 가능하다. 단기적으로는 국토부 고시로 ‘광역교통 공론 절차 지침’을 마련할 수 있다. 중기적으로는 국회가 교통시설특별법을 개정해 시민 참여의 법적 근거를 명문화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수도권광역교통위원회에 상설 협의체를 두어 노선·보상·생활SOC를 원스톱으로 조정해야 한다. 시민배심원단 예산은 전체 타당성 조사 비용의 1~2%면 충분하다. 사회적 비용 절감을 생각하면 가장 값싼 보험이다. 정치적 의지만 있다면 내년 예타·기본계획 착수 사업부터 적용할 수 있다.
GTX는 선거철마다 단기 공약으로 소비돼 왔다. 표 계산 정치가 공론을 대체해온 결과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그러나 GTX의 성공은 교통 편의를 넘어선다. 시민이 “우리 의견이 정책에 반영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때 그것은 곧 사회적 자본인 신뢰로 전환된다. 결국 GTX 갈등은 우리에게 묻는다. 정책은 지도 위에 선을 어디에 긋느냐가 아니라 시민 마음속에 어떤 선을 그을 것인가의 문제다. 정치가 이 사실을 외면한다면 철도가 닿지 않는 곳에 남는 것은 빈 땅이 아니라 깊은 상처일 것이다. GTX는 교통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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