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끝없는 생명의 숨결
담장의 오래된 기억의 틈새로
세월의 숨결이 스쳐간다.
풀은 기어이 균열 속에 뿌리를 내리고,
빛을 향해 몸을 뻗어 올린다.
하늘과 땅 사이,
여전히 가느다란 선율처럼 매달린 선들은
손길에서 멀어져 갔으나
그 곁에서 풀잎은 바람에 흔들리며
폐허 위에 새로운 시간을 새긴다.
사라짐은 끝이 아니다.
다른 시작의 얼굴일 뿐,
무너진 자리는 기억이 되고
기억은 다시 생명을 불러낸다.
그곳에서 우리는 안다.
죽음이 지나간 자리마다
언제나 생명의 길이 이어지고 있음을
#2. 바람따라, 하늘따라
어둠을 몰고 가는 시간은 바람을 따라 유유히 세상을 떠돈다.
저녁 무렵의 하늘은 아직 온전한 어둠을 품지 못한 채, 빛과 그림자의 경계 위에서 서성인다.
나무들은 자신들의 그림자를 지워내듯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땅은 서서히 어둠 속으로 흩어지며 저 너머로 스며든다.
비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경계를 넘어, 그 틈새에서 스스로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날아오른다는 행위는 곧 두 기운이 교차하는 보이지 않는 문턱 위에서 이뤄지는 자기의 발견이다.
땅의 무게를 벗어나는 동시에, 하늘의 가벼움에 몸을 의탁하며, 존재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다시 묻는다.
비행은 탈출이 아니라 귀환이며, 단절이 아니라 연결이다.
하늘을 통해 땅을 품고, 땅을 통해 하늘을 기억하며, 바람과 시간,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그곳에서 존재는 비로소 자신을 새롭게 읽어낸다.
#3. 미루나무의 기억
어릴 적 우리 집 앞에는 대여섯 그루의 미루나무가 서 있었다.
봄이면 조그만 연둣빛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 마음을 간지럽히듯 다가왔다.
그 떨림은 어린 날의 설렘을 일깨우고 세상이 새롭게 시작된다는 신호처럼 다가왔다.
여름이면 잎사귀들은 은빛으로 반짝이며 끝없이 팔랑거렸다. 그늘 아래 평상에 누우면 햇살은 부드럽게 걸러지고, 바람은 나뭇잎 사이에서 나만을 위한 노래를 불러줬다.
가을이 되면 미루나무는 황금빛으로 변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수천장의 잎사귀가 흩날려그 길을 걸어가는 내 발걸음까지풍요로움으로 감싸줬다.
나는 그 황홀한 빛 속에서계절 하나를 온전히 품은 듯했다.
겨울, 나무는 잎 하나 남기지 않고 쭉 뻗은 몸만을 드러냈다.
그 곧은 선은 어린 내 눈에 하늘로 닿는 꿈처럼 보였다.
‘나도 언젠가 저 나무처럼 크고 당당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겨울마다 조용히 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미루나무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계절마다 다른 얼굴로 다가와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자연의 현현(顯現)이었고, 그 나무는 사계절의 빛깔로 내 어린 시절을 끌어안아 줬다. 변화 속에서도 꿋꿋이 서 있음으로써 삶의 모양을 조용히 가르쳐 줬다.
미루나무는 여전히 내 안에서 흔들린다. 봄의 설렘, 여름의 평화, 가을의 황홀, 겨울의 희망. 그 모든 시간이 겹겹이 쌓여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기억의 뿌리가 되는 퍼즐 한 조각이다.
#4. 기와 끝의 복
낡은 기와 끝
푸른 바람이 내려앉는다
깎이고 닳은 자리에
여전히 남은 글자 하나 ― 복
물질이 아니라
숨결이 이어지길 바라는 뜻
태고의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기도의 흔적
햇살에 번져
하늘을 향해 고개 드는 순간
나는 안다
복은 저 멀리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곁에
조용히 함께 있다는 것을... 홍채원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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