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청산리대첩 105주년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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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운동으로 일제의 폭력에 맞서 독립투쟁을 선언했다. 손에 손잡고 태극기를 흔드는 물결이 온누리를 뒤덮었다. 많은 이들이 일제의 총칼 앞에서 쓰러져 갔다. 1919년 봄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일어난 3·1운동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로부터 1년 뒤 도도한 물결은 중국으로 이어졌다. 저항의 방식도 무저항에서 무장 투쟁으로 바뀌었다. 독립군 부대가 속속 결성됐다. 연해주와 만주 등지를 중심으로 일본군에 대항하는 소규모 전투들도 본격화됐다.

 

이런 가운데 중국 지린성 화룡현 청산리에서 독립군의 위대한 승리 소식이 들려왔다. 승전의 주축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등 독립군 연합부대였다. 청산리대첩이 그랬다. 1920년 10월20일이었다.

 

그 늠름한 역사의 현장으로 더 들어가 보자.

 

일본군이 독립군을 에워쌌다. 일본군 기병부대가 산림 속으로 들어섰다. 이때였다. 숲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 500여명이 궤멸됐다. 160리를 강행군해 일본군의 포위망도 뚫었다. 이 전투에서 살아 도망친 일본군 병사는 단 4명뿐이었다.

 

일본군은 상급 부대에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독립군은 이미 고지를 먼저 점령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를 알 리 없는 일본군이 또다시 쳐들어 왔다. 1천명 대 1만명의 혈전이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독립군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움에 임했다.

 

물론 희생도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독립군의 기관총대장 최인걸은 기관총수가 모두 부상을 당하자 자신의 몸에 총열을 묶어 놓고 기관총을 쏘기도 했다. 최인걸 대장을 비롯해 후면 독립군 1소대는 전원 전사했다.

 

이틀 후 일본군은 사상자 1천여명을 내고 마침내 퇴각했다. 이후 적의 사상자는 3천300여명에 달했다. 독립군 사상자는 100여명에 그쳤다. 일본군 1만여명을 상대로 거둔 가장 큰 승전이자 항일 무장투쟁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망국 10여년의 원한에 사무친 독립군이 만주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였다.

 

105년 전 오늘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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