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제조·인프라 산업 수출 ‘성과’...싱가포르·말레이, 장기적 정착지로 화상상담·통상촉진단 등 기업 지원도...성장동력 무궁무진한 신흥시장 주목
돌아오지 않는 기업들④ 탈한국 넘어 미래 전략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진출 전략이 기존과는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 과거 인건비나 규제 등 국내 여건의 어려움으로 인한 ‘탈(脫)한국’ 움직임을 넘어, 이제는 성장 잠재력이 뚜렷한 신흥 시장에 장기 정착해 미래 성장 동력을 모색하는 전략적 움직임이 두드러지는 모습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 기업들의 새로운 수출 시장이자 장기적인 해외 정착지로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등이 대표적으로 떠오른다. 두 국가는 공통적으로 첨단 인프라 수요가 빠르게 느는 추세다. 싱가포르는 글로벌 금융·물류 허브이자 혁신 중심지로 지난해 세계지식재산기구(WIPO) 혁신지수 4위를 기록했다. 제도·기업 성숙도·연구 역량 부문에서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을 보여 기업 활동 기반이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재난·안전·스마트시티 등 신산업 인프라 확충에 대한 수요도 높아 관련 기업들의 정착 기회를 확대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동시에 성장시키는 구조가 특징이다. IMF는 올해 말레이시아의 성장률을 4.7%로 전망했으며, 민간소비와 제조업 가치사슬 강화 정책이 주요 동력이다. 특히 전자·전기(E&E) 산업은 전체 수출의 40%를 차지할 만큼 경쟁력이 높다. 인프라 측면에서도 수도인 쿠알라룸푸르와 클랑밸리는 금융·서비스 중심, 페낭·조호르는 제조·물류 거점 산업단지로 기능 분담이 이뤄져 국내외 다양한 산업 수요를 흡수하고 있다.
실제 교역 지표도 이를 보여준다. 트레이딩 이코노믹스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대(對)싱가포르 수출액은 약 182억 달러로, 반도체·정밀화학이 주를 이뤘다. 같은 해 대말레이시아 수출액은 약 104억 달러로, 전자기계·통신 분야가 주력 품목이었다. 두 나라 모두 첨단 제조와 인프라 산업이 수출 성과를 이끄는 주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신시장으로 주목받는 지역에서는 한국 기업들을 돕는 지원망도 단단하다. 싱가포르는 2020년부터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이 운영하는 K-스타트업센터(KSC)가 대표적이다. 현재 16개사가 입주해 있으며, 초기 정착부터 사업화·성과 창출 단계까지 이어지는 ‘패키지 지원’을 받고 있다. 사무공간 제공은 물론, 현지화 컨설팅과 투자 연계까지 전 주기적 서비스를 제공하며 기업을 지원한다.
말레이시아에서는 경기비즈니스센터 쿠알라룸푸르(GBC KL)가 경기도 기업의 교두보로 자리 잡고 있다. GBC KL은 경기도내 중소기업의 수출지원을 위해 2008년 설립됐으며, GBC 수출대행사업과 바이어 인콰이어리 발굴, 화상상담, 통상촉진단 등 다양한 수출지원 사업을 통해 경기도내 중소기업을 지원하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관계자는 “과거의 인건비 절감형 해외 진출을 넘어 최근에는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성장 잠재력이 뚜렷한 신흥 시장에서 장기적인 비즈니스 기반을 구축하려는 우리 기업들의 전략적 움직임이 활발하다”며 “해외 진출의 고도화는 기업 경쟁력 강화에는 긍정적이지만, 동시에 국내로 기업을 유턴시키기 위한 정책적 노력과 차별화된 매력 창출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진출 전략이 고도화되면서 성장 잠재력이 높은 신흥 시장이 새로운 장기 정착지로 각광받고 있다. 특히 말레이시아 시장에서는 한국 기업들의 활약이 눈에 띄게 커지는 모습이다.
‘K-문화·기술’ 현지화 성공... ‘말레이’ 세계 경쟁력 교두보
■ 현지에 스며든 K-라이프스타일…말레이시아 ‘한류의 일상화’
쿠알라룸푸르 중심가를 걷다 보면 한국 기업의 존재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번화가 대형 전광판에서는 코웨이와 삼성전자의 광고가 번갈아 나오고 대형 쇼핑몰 안에는 파리바게뜨, BHC, 두끼 같은 매장이 입점해 점심시간마다 긴 줄을 만든다. 최근 몇 년간 현지에서는 무인사진관 ‘포토이즘’이나 ‘인생네컷’ 같은 K-포토부스도 유행처럼 확산됐다. 케이팝 아이돌이나 드라마 IP 포토 프레임을 활용해 젊은 세대의 SNS 놀이문화로 자리 잡은 것이다. 한국 제품과 서비스가 단순 수출을 넘어 현지 생활과 문화 속으로 스며든 결과다.
말레이시아는 다민족 국가다. 거리에서는 히잡을 쓴 여성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말레이계·중국계·인도계가 함께 경제 활동을 이끈다. 1인당 GDP는 약 1만3천 달러로 동남아 상위권을 기록하며, 30대 이하 젊은 층의 비중이 높아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수용력이 크다.
이 같은 여건 속에서 한국 기업의 성과도 확연히 늘고 있다. 코웨이는 2006년 현지 진출 후 정수기·공기청정기 렌털 서비스를 도입해 현지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지켰다. 특히 무슬림 고객을 고려해 할랄(HALAL) 인증 정수기를 선보이는 등 철저한 현지화 전략으로 신뢰를 확보했다.
현대자동차는 말레이시아 시장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해 2025년 현지 법인을 세우고 조립공장을 운영한다. 내수 판매뿐 아니라 아세안 역내 공급망 허브로 기능을 확대하기 위해서다. 소비재와 제조업을 가리지 않고 한국 기업들이 발 빠르게 영역을 넓히고 있는 셈이다.
외식 프랜차이즈도 활발하다. SPC 그룹은 지난해 말레이시아 수도 한복판에 파리바게뜨 1호점을 열었다. 현지 대기업 버자야 그룹과 합작으로 설립된 매장으로, 곧 조호르바루 공장이 완공되면 동남아와 중동을 아우르는 거점이 될 전망이다. 한류 콘텐츠와 접목된 소비문화는 무인사진관을 비롯해 다양한 방식으로 확산되고 있다.
■ “말레이시아는 교두보”…경기도 기업 돕는 GBC KL
이 같은 성과 뒤에는 지원 조직의 뒷받침이 있다. 경기도가 2008년 설립한 경기비즈니스센터(GBC) 쿠알라룸푸르는 도내 중소기업의 교두보 역할을 맡아왔다. 김지연 GBC KL 소장은 “센터는 매년 20개사 이상의 기업을 지원하고 있고, 최근 3년간 53건·700만 달러 규모 계약을 성사시켰다”며 “화장품·식품 같은 소비재뿐 아니라 의료기기, 건축자재 등 다양한 산업군을 돕고 있다”고 설명했다.
GBC KL은 단순히 바이어를 연결하는 수준을 넘어 수출대행, 인콰이어리 발굴, 화상상담, 통상촉진단 운영 등 단계별 지원 체계를 구축했다. 특히 2011년, 2014년, 2016년 개최된 한국상품전시회 ‘G-FAIR KL’은 현지에서 가장 큰 한국상품 박람회로, 한국 브랜드의 신뢰도를 높이는 전환점이 됐다. 김 소장은 “중장기적으로는 G-FAIR KL 재개최를 준비해 도내 기업들이 더 많은 바이어와 접촉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말레이시아 시장의 기회와 위험 요인을 동시에 짚었다. 김 소장은 “소비 역량 성장과 산업 거점 분화는 큰 장점이지만, 제도 변화가 잦고 행정 절차가 더디다는 점은 진출 기업에 부담”이라며 “다민족 사회 특성상 집단마다 문화와 네트워크가 다르기 때문에 초기에는 예상치 못한 혼란을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어 기반의 비즈니스 환경, 풍부한 인재풀, 세제 혜택 같은 장점이 이를 충분히 상쇄한다”고 덧붙였다.
최근에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추진하는 Malaysia Digital Status(MD 인증) 제도도 새로운 기회로 떠오른다. 외국 기업에 세제 혜택과 인력 확보를 제공하는 이 제도는 지난해 상반기에만 451개 기업이 인증을 획득했으며, 그중 39%가 외국 기업이었다.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는 흐름에서 ICT·스타트업 분야로의 진출 가능성도 열리고 있는 것이다.
김 소장은 앞으로의 지원 방향에 대해 “기업마다 상황이 달라 내수기업의 수출기업화, 수출유망기업의 시장 다변화 등 맞춤형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며 “산업별 유력 바이어와 지속 교류해 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내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말레이시아 진출은 단순한 해외 판매처 확대가 아니라, 경기도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교두보”라며 “센터의 네트워크와 경험을 활용해 장기적 성과를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특별기획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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