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소식통

[공감, View] 오래된 숨 자국 外

#1. 오래된 숨 자국

 

image

오래된 숨의 자국

그 속에

조용히 피어난 붉은 꽃 하나.

 

빛이 든 틈 속에

생명이 꽃핀다.

 

누군가의 손이 닿지 않은 그곳

갈라진 마음의 벽 틈에서

숨 쉬는 그대!

 


#2. 떨어진 감 하나

 

image

햇살 아래 굴러온 감 하나!

시간에서 밀려나온 작은 별처럼 땅 위에 놓여 있다.

 

더 이상 ‘열매’가 아니라

자연의 질서와 우연 사이에 놓인 사물!

 

흙먼지와 잔풀 사이에서

익어가며 마지막 빛을 낸다.

생의 끝자락에서도 색을 잃지 않으려는 듯,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태도…

 

우리는 대개 지나치지만,

사소한 장면이

삶이 우리에게 슬며시 들려주는 진짜 목소리인지 모른다.

 

멈춰 바라볼 때에만 들리는 말,

모든 생은 떨어진 뒤에도 잠시 아름답다.

 


#3.  남은 자리의 기척

 

image

아주 가벼운 숨,

허공에 자신을 걸어두고 있는 나뭇가지들.

 

잎은 이미 대부분 떠났고,

남은 몇 잎마저 바람의 기척에 흔들리며

마지막 계절을 견뎌내고 있다.

 

가을의 끝은 색이 연하다.

그 연한 색 뒤편,

남겨진 선이 또렷해진다.

 

화려함이 모두 걷히고 난 뒤에야

비로소 세계의 뼈대가 드러나는,

그것이 이 계절이 남기는 가장 조용한 여운이다.

 


#4. 흙내음

 

image

김장 철이 다가오면 유독 달달한 겨울 대파가 떠오른다.

 

그 향과 단맛은 언제나 어떤 따뜻한 기억을 불러낸다.

 

어느 해, 잠시 쉬어가는 틈에 시골의 한적한 미술관을 찾은 적이 있다.

 

전시를 보고 나오는데, 미술관 옆 어르신이 겨울 대파 한 줌을 뽑아 건네주셨다. 막 뽑힌 대파는 흙의 기운을 고스란히 품고 있어 그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는 듯 가슴이 달달해졌다. 손에 올려보니 땅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 은은한 흙냄새가 손끝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런 정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 새삼 고마웠다.

 

시골의 시간은 느린 호흡으로 흐르고, 사람의 마음은 오래 묵은 흙처럼 넉넉했다. 도시의 삶 속에서 잊고 지냈던 온기가 그날은 뜻밖의 선물처럼 다가왔다.

 

차갑게 식어가는 겨울 바람과는 달리, 그날의 햇살은 어머니 품처럼 부드럽고 포근했다.

 

그 따스한 빛 속에서 건네받은 한 줌의 대파와, 그 안에 담긴 한 사람의 마음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이다.

 

올해가 가기 전, 그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조용히 다시 옮겨보려 한다.

 

홍채원 사진작가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