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 성결대 교수·영화평론가
극장 산업의 침체는 팬데믹 이후 변화한 관객성과 밀접하다. 팬데믹 동안 OTT에서 장르성이 뚜렷한 콘텐츠를 손쉽게 접한 관객은 더 이상 극장까지 갈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돈과 시간을 들여 외출할 만큼 확신이 드는 작품이 아니라면 발걸음은 집 밖으로 향하지 않는다. 클릭 한 번으로 시청을 시작하고 재미가 없으면 바로 멈춘다. 편리하지만 공허한 풍경이다. 그래서 화제도 빠르게 불붙고 금세 꺼져 버린다.
이 환경을 위기로 보는 시각이 크지만 또 다른 변화를 품고 있다. 극장의 필연적 쇠퇴 속에서도 관객은 더 신중하게 영화를 고르고 더 깊게 작품을 만난다. 유행 따라 소비하던 방식은 힘을 잃고 영화를 하나의 세계로 대하는 시네필의 태도가 새로 부상하고 있다.
2025년은 독립예술영화가 작품성과 관객 동원에서 의미 있는 성취를 만든 해처럼 보인다. 계절마다 시대정신과 실험정신을 품은 영화들이 극장을 지켜냈다. 올해 큰 울림을 준 작품들은 ‘아침바다 갈매기는’(박이웅), ‘여름이 지나가면’(장병기), ‘3670’(박준호), ‘3학년 2학기’(이란희), ‘세계의 주인’(윤가은), ‘사람과 고기’(양종현) 등이다.
이 영화들은 사회적 소수자와 노동계급을 중심에 놓고 현실의 문제를 진지한 리얼리즘으로 응시한다.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젊은 어부를 위해 침묵을 택하는 괴팍한 노인을 따라간다. 양희경·윤주상 등 중견 배우들의 앙상블, 이주 외국인 여성과 청년 노동자의 삶이 교차하며 바닷가 마을의 비극과 이웃의 연대가 잔향을 남긴다.
‘여름이 지나가면’은 소년들이 겪은 한여름 해프닝을 통해 ‘어른의 규칙 밖’에서 벌어지는 비정함을 보여준다. 10대 소년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는 오래 마음에 남는다. ‘3670’은 탈북한 게이 청년이 정체성을 찾아 게인 친구들과 만나다가 고립및 상처와 맞닥뜨리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는 슬픔을 강요하지 않고 어디에나 살고 있을 이웃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3학년 2학기’는 특성화고 실습생의 노동 현실을 조용히 파고든다. 대졸 중심의 고용 구조에 가려진 청소년 노동 문제를 진지하게 드러낸다.
올해의 영화로 불릴 만한 ‘세계의 주인’은 피해자다움의 허구를 정면으로 건드린다. 큰 상처를 겪은 여고생이 ‘평범하게 살아갈 권리’를 스스로 증명해 내는 기특한 영화다. ‘사람과 고기’는 박근형, 장용, 예수정 등 노년 배우들의 힘으로 빛을 발한다. 평생 열심히 살았으나 고기 한 점 맘 편히 먹지 못하는 노년이 된 이들의 치기 어린 행동은 웃음과 슬픔이 묘하게 섞인 해방감을 안긴다.
이 여섯 편의 영화는 스펙터클보다 인물의 심리와 관계를 좇으며 도파민 소비에 길든 감각을 향해 거꾸로 나아간다. 여백을 남기고 인위적 연출을 줄였으며 절제된 대사와 현장 사운드, 침묵의 리듬을 내세운다. 로컬의 감각도 핵심이다. 지역 소도시, 공장, 학교, 바다, 골목 같은 장소가 익숙하면서도 갇힌 공간처럼 그려지고 그 안에 삶의 무게가 켜켜이 자리 잡는다. 교훈보다 체험과 공감을 중시하는 내러티브다.
천만 관객 영화는 신화가 됐고 중심이 흔들리자 작은 영화들이 균열을 만들고 있다. 한국 영화는 플랫폼 시대에 더 작고, 더 느리고, 더 일상적인 감각으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 산업은 위축됐지만 감각은 깊어졌고 영화의 폭은 오히려 넓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쇠퇴가 아니라 조용한 반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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