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일찬 말이되는연구소 대표
도시의 성숙은 마천루를 얼마나 빨리 쌓아 올렸는가로 증명되지 않는다. 무엇을 지키고 어디를 비워둘지를 아는 ‘절제의 미학’, 그 고요한 멈춤이 자리 잡을 때 비로소 도시의 품격은 드러난다. 최근 종묘 앞 완충구역에 140m 고층 빌딩이 들어설 수 있다는 소식이 서울을 흔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한 구역의 재개발 여부를 넘어 대한민국이라는 도시 문명이 앞으로 어떤 질서와 기준으로 자신을 정의할지 묻는 근본적 질문이다.
종묘는 조선의 국가 질서가 박제된 공간이 아니라 한국 도시문명의 기원을 담은 심장부다. 유네스코가 이를 “국가의 세계관과 도시 구조가 통합된 예외적 사례”로 평가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정전(正殿)의 낮은 지붕선 위로 펼쳐진 하늘은 500년 동안 한번도 흔들리지 않은 도시의 윤리적 경계이며 권력이 스스로를 절제해 온 드문 기록이다. 이런 종묘의 완충구역에서 고도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것은 이 오래된 경계를 단순한 개발 지표로 환산하겠다는 선언이자 도시가 스스로 세운 금도(禁度)를 시장 논리로 덮어 버리려는 위험한 시도다.
그러나 종묘 보존 논쟁에서 토지주와 상인의 절박함을 ‘탐욕’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문화재가 밥 먹여 주느냐”는 항변은 생존이 걸린 이들의 거친 외침이 아니라 수십년간 낙후를 감내해 온 도시 내부의 깊은 균열을 드러낸다. 문제는 욕망의 존재가 아니라 그 욕망을 어떻게 다루느냐다. 개발이냐 보존이냐라는 낡은 이분법만으로 도시의 시간을 끊어내는 방식은 이미 세계 도시들에서 유효한 해법이 아니다.
뉴욕은 같은 갈등에 ‘제3의 길’로 응답했다.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상부의 개발하지 않은 공중권(Air Rights)을 떼어내 인근 개발지로 사고팔 수 있도록 한 용적이양제(TDR)는 도시가 채택한 가장 창의적인 제도 중 하나다. 역사적 건물은 그대로 남기고 소유주는 개발 이익을 보상받으며 도시는 시간의 기억을 지켰다. 욕망을 억누르는 대신 우회시키는 방식으로 도시 전체의 품격을 높이는 문명적 해결 방식이었다.
경관은 단순한 ‘뷰(View)’가 아니다. 공동체가 축적한 시간이며 시민 누구나 평등하게 누려야 할 공공적 자산이다. 파리가 에펠탑 주변을 비워 두고 런던이 템스강 스카이라인을 관리하며 도쿄가 황궁 주변의 조망을 엄격히 제한하는 것은 관광 수입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다음 세대에게 남겨야 할 도시의 자존심이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판단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그 결정이 수도권 전체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인구 1천400만명의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을 이루는 경기도는 서울의 도시계획을 준거집단으로 삼아 왔다. 종묘 앞을 140m 건물로 가리는 순간 경기도가 수원화성이나 남한산성 주변의 경관축을 지켜낼 명분은 급격히 줄어든다. “서울도 하는데 왜 우리는 안 되는가”라는 논리가 퍼지는 순간 수도권의 고유한 풍광과 역사적 결은 도미노처럼 흔들릴 것이다.
도시는 기억으로 산다. 기억을 지운 자리에 아무리 웅장한 마천루를 세운들 그것은 결국 콘크리트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도시의 정체성은 스카이라인의 높이가 아니라 스스로 넘지 않으려는 선(線)에서 드러난다. 문명은 빠르게 건물을 올리는 기술이 아니라 긴 시간에 책임을 지는 태도로 완성된다.
종묘의 하늘을 가리려는 140m의 욕망 앞에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미래 세대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더 크고 높은 빌딩 숲인가, 아니면 500년의 시간을 품은 고요한 하늘인가. 그 선택이 곧 우리의 도시 문명이 지닌 ‘격(格)’을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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