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미신 범죄 ‘면죄’ ‘감면’ ‘백성의 기복 유래’ 존중하라 600년 뛰어넘는 聖君 정치
두박신 사건. 사이비 종교였다. ‘두박’은 사람 넘어지는 소리다. 옛날에 참형당한 장수와 재상의 혼을 소환했다. 그들의 이름을 적어 나뭇가지에 걸었다. 백성들이 놀라 종이와 베를 내놓았다. 강유두, 박두언, 최우 등이 만들었다. 밑바닥에 반정부 저항이 흘렀다. 고려조 충신들에 대한 동경이었다. 국법에 강유두는 교형에 처해져야 했다. 박두언·최우는 장 100대, 유배 3천리가 맞았다. 대신들이 임금에게 법대로 엄벌을 청했다.
임금이 대답했다. “그 정상을 생각해 보면, 화(禍)를 두려워하고 복을 받으려고 귀신에게 기도한 것뿐이었다. 또 한재(旱災·가뭄 재해)를 당해서 차마 중하게 죄 줄 수 없어서, 장차 경한 죄로 감해서 시행하고자 하니, 여럿이 의논하여 아뢰라”(세종 18년 5월28일·1436년).
시왕도 사건. 한양 바깥 사찰에서 유행했다. 죄인이 죽어서 간다는 지옥 그림이다. 몸에 못 박는 모습, 오장육부 끄집어내는 모습, 끓는 물에 빠져 있는 모습.... 10개 지옥 모습이 끔찍했다. 겁먹은 백성들이 구원을 위해 재물을 바쳤다. 사간원이 임금에게 고했다. “간사한 승도들이 생업으로 백성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백성의 폐해가 이 그림에서 연유됩니다. 그림 둔 사찰을 불태우거나 헐어 버리게 하고... 죄를 주게 하옵소서.”
임금이 대답했다. “(승도들의 처벌을) 윤허하지 아니한다”(세종 22년 1월25일· 1440년).
불교 혁파 청원. 집현전 제학 윤회가 상소문을 올렸다. “불씨(佛氏)가 심하였다고 하는 것은, 이적(夷狄)의 풍속으로 사민(四民)의 밖에서 백성들로 하여금 궁곤에 빠지게 하여 도적질하게 만들었으니, 그 죄가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백성들이 굶다가 죽는 것은 보았어도, 승려들이 굶주려 죽는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날마다 방자하게 속이고 꾀어서 백성들의 고혈만 녹이니, 신 등은 이리하여 마음 아프게 여기는 바입니다.”
임금이 대답했다. “불씨의 법이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급거히 한번에 다 개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세종 6년 3월8일·1424년).
세종은 너그러운 애민 군주였다. 백성을 보듬는 왕이었다. 하지만 국법 집행에는 추상 같았다. 조선 시대 왕이 27명이다. 사형을 가장 많이 집행한 왕이 바로 세종이었다. 400명 이상의 죄인을 사형시켰다. 사지를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도 60명에 달했다. 조선은 유교에 기반한 나라였다. 억불(抑佛)은 조선 개국의 유지였다. 숭불(崇佛)은 국정에 반하는 거였다. 사이비 종교 처벌은 더 엄했다. 민심을 교란시키는 중범죄였다.
하지만 세종의 접근은 사뭇 신중했다. 종교의 출발을 민심에서 찾았다. ‘가뭄이 심하니 복을 빌었던 것이다’, ‘민가에 오랜 세월 뿌리 내린 신앙이다’.... 종교의 기능을 국정 불만의 발현으로 봤다. 피로 물들인 역성혁명의 조선조다. 그때까지 고려에 대한 향수가 만연했다. 역모가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불안한 여론을 누르지 않고 보듬어 달랬다. 종교의 역사를 정치보다 위에 놨다. 섣불리 개혁하려 들지 말라고 했다.
시왕도를 그렸던 승려. 사간원 주장은 참형. 세종은 덮어두라 했다. 두박신을 만든 강유두. 국법의 규정은 교형. 세종은 감형하라 했다. 만일 참형과 교형을 내렸다면 어땠을까. 실록에는 종교 탄압의 예로 남았을 거다. 읽기 불편한 부분으로 여겨졌을 거다. 세종은 그러지 않았다. 시공을 초월하는 울림을 남겼다. 600년 지난 지금도 어색하지 않을 ‘하교’를 내렸다. 종교 문제 처리에서조차 확인되는 세종대왕의 성군스러움이다. 主筆 김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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