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선 심산기념사업회장·前 관세청장
투루판에 고창고성, 교하고성, 지하수로 카레즈 등 많은 유적이 있다. 현재 투루판 인구는 70만명이 넘는다. 타클라마칸사막 중심에 거대한 현대식 도시가 만들어졌다. 옛날 오아시스 모습은 전혀 느낄 수 없다. 톈산산맥의 물을 끌어와 식수를 제공하고 주변 농지에서 포도, 옥수수 등 농작물을 재배한다. 투루판 인구의 70%가 위구르족이다. 이곳부터 서쪽은 위구르족이 한족보다 많다고 한다. 주요 건물의 상호, 도로표지판은 한자를 위에 크게 적고 아래쪽에 위구르 문자를 병기하고 있다.
투루판은 넓은 포도밭이 산재해 건포도 말리는 흙벽돌 창고를 도로 옆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투루판의 ‘씨 없는 건포도’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오후 4시 ‘고창(高昌)고성’에 도착했을 때 기온은 섭씨 44도였다. 고창고성은 6, 7세기 고창국의 수도이고 9세기 이후는 위구르 왕국의 수도였다. 고창고성 매표소 앞에 당나라 현장 법사가 죽장을 들고 서 있는 동상이 있다. 고창고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지었으며 성곽의 길이는 5㎞다. 전동카트를 타고 폐허가 된 1천400년 전 고창고성 유적을 둘러봤다. 불탑의 초창기 형태인 ‘스투파’는 외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스투파 내부에 있던 불상은 이슬람교에서 우상숭배라는 명분으로 대부분 파괴됐다. 특히 불상의 눈이 집중적으로 훼손돼 있다. ‘눈’은 영혼의 상징이기에 눈을 파괴하면 영혼을 파괴할 수 있다는 미신 때문이다. 15세기 이후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손들이 자기 선조들이 믿었던 불교 유적을 파괴한 것을 보면서 광신적 종교의 무서움에 전율이 느껴진다.
인도에서 시작한 탑(스투파) 양식은 중국, 한국으로 오면서 우리가 절에서 흔히 보는 아담한 ‘석탑’으로 변했다. 629년 가을 현장 법사가 고창국 왕에게 설법했다는 법당 유적은 최근에 복원해 깔끔하다. 고창 왕은 하미에 도착한 현장 법사의 소식을 듣고 투루판으로 모셔 와 국빈급 대우를 했다. 왕은 현장에게 고창국에서 불법을 설법해줄 것을 부탁했다.
현장은 단식투쟁을 하며 단호히 ‘천축으로 떠나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타협해 한 달만 설법하고 떠나기로 했다. 대신 현장이 공부를 마치고 당나라로 귀국할 때 고창국에 들러 설법하기로 약속했다. 고창 왕은 현장이 떠날 때 동행할 승려, 인부, 말과 비단, 금은보석 등 여비도 듬뿍 주고 인접한의 왕에게 소개장을 써주는 등 현장이 천축으로 가는데 많은 편의를 제공했다. 하지만 16년 후인 645년 현장이 귀국할 때 이미 고창국은 당나라에 의해 멸망(640년)한 후였다. 현장은 투루판에 갈 일이 없어졌기 때문에 타클라마칸사막 남쪽 ‘서역남로’를 통해 귀국했다.
고창고성을 쌓은 흙벽돌은 버드나무 가지와 풀 줄기를 찰흙과 섞어 만들었다. 나무가 없는 사막 지역이니 흙이 건물의 주원료다. 고창고성 성벽이 쉽게 망가진 것은 이곳 농부들이 나뭇가지, 풀줄기가 들어간 흙벽돌을 가져다 부숴 비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창국은 왕 국문태가 대외관계를 오판해 640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고창왕은 실크로드 무역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유목민 강대국인 서돌궐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인근 영세 오아시스 왕국을 압박했다.
고창 왕은 수천㎞ 떨어진 당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지 못할 것이라고 오판한 것이다. 핍박을 받은 오아시스 소국들은 멀리 장안의 당 태종에 구원을 요청했고 당 태종은 장안에서 수천㎞ 떨어진 투루판까지 군대를 파견해 640년 고창국을 멸망시켰고 아들인 고종은 서쪽의 강대국 서돌궐을 655년 정복했다. 당 태종은 645, 647년 두 차례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패배했으며 그가 죽기 전 고종에게 향후 고구려를 침략하지 말 것을 유언했다.
고종은 서쪽의 위협 세력인 서돌궐을 먼저 정복하고 서쪽을 안정시킨 후 동쪽 한반도로 군대를 보내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를 멸망시킨다. 이때 서돌궐을 무너뜨린 당나라 장군은 소정방이다. 소정방은 백제 침략군 사령관으로 부여에 와서 부여의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자기의 전공을 기록해 놨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만일 서돌궐이 쉽게 멸망하지 않았으면 신라의 삼국통일이 다른 방향으로 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창고성을 본 다음 오후 7시경 ‘교하(交河)고성’에 들렀다. 교하는 두 개의 강물이 교차한다는 의미다. 기원전 3세기 투루판에 있었던 차사왕국의 수도가 교하고성이다. 야르나이즈강 가운데 버들잎 모양의 길이 1천600m, 폭 300m의 작은 섬에 수도를 건설했다. 섬 양옆으로 강물이 흘러 성을 보호하는 해자(垓子) 역할을 한다. 약소국 차사왕국은 2천200년 전 강대국 흉노족과 한나라에 각각 왕자를 볼모로 보냈다. 두 강대국에 줄타기 외교를 하다 한나라에 의해 멸망한 작은 오아시스 왕국이다.
어쨌든 2천년 넘게 긴 세월의 풍파를 지나고도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한다.
당나라 시인 두보가 쓴 ‘춘망(春望)’이라는 유명한 시가 있다.
“나라는 망하여도 산하는 남아 있어. 성안에 봄이 오니 수목만 무성하구나. 시국을 생각하니 꽃도 눈물을 뿌리게 하고. 이별을 한탄하니 새도 마음을 놀라게 하고. 봉홧불이 석달이나 계속되니. 집에서 오는 편지는 만금에 해당한다.”
특산물 포도를 재배하려면 많은 물이 필요하다. 1년 강수량이 20여㎜로 거의 비가 안 오는 지역인데도 투루판의 면적 70%가 포도 재배 지역이다. 투루판 농민은 지하에 수로로 연결된 ‘카레즈’를 만들어 농사를 짓는다. 수백㎞ 떨어진 톈산산맥의 물을 지하에 땅굴을 만들어 끌어온다. 해수면 이하 저지대가 투루판 면적의 80%가 넘는다.
저지대는 매우 건조해서 증발지수가 매우 높다. 수로를 지상으로 만들면 물이 투루판에 도착도 하기 전에 전부 증발한다. 지하 10m 깊이에 수로를 파 연결한 수로의 전체 길이가 5천㎞라고 한다. 기원전 7세기 이란으로부터 기술을 들여와 수천년 동안 땅속에 수로를 판 셈이다. 지금도 계속 지하수로를 보수해 포도 재배와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어 경이로움을 느낀다. 중국인들은 ‘만리장성, 대운하, 카레즈’를 3대 토목사업이라고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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