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나라를 세운 지 무려 217년이나 지났다. 위기가 찾아왔다. 중앙 집권세력과 지방분권이 대립했다. 정치는 불안정했고 권력 다툼도 이어졌다. 문벌귀족 중심의 개경(개성)과 서경(평양) 세력의 갈등이었다. 나라 밖 정세도 만만찮았다. 대륙에선 금나라가 급성장했고 여진족의 침입도 잦았다. 고려 중기의 서사다.
이런 가운데 수도를 개성에서 평양으로 옮기자는 서경천도운동이 시작됐다. 승려이자 문신인 한 인물을 중심으로 개경 중심의 유교적 정치체제에 반발해 깃발을 들었다. 금나라 정벌론과 서경천도론도 내세웠다. 평양성 축성과 성곽 개수도 진행됐다. 그 시작이 1135년 1월19일 아침이었다.
역사는 이 사태를 주도했던 승려의 이름을 따 ‘묘청의 난’으로 정리했다. 1년여간 이어졌지만 실패로 결말이 맺어졌다.
묘청의 행적을 살펴보자. 그는 서경파 신하의 추천으로 인종의 왕사로 임명됐다. 관료들이 참석하는 회의에서 서경천도론을 펼쳤지만 김부식 등 보수세력의 반대로 번번이 좌절됐다. 당시의 정치제체를 오늘날의 버전으로 따지면 개성 세력은 유교를 숭상하는 기득권이었고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자는 측은 불교를 신봉하는 개혁세력이었다. 묘청은 유교를 신봉하는 관료의 사대적이고 유약한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중국처럼 왕을 황제라고 부르자는 ‘칭제건원’도 주창했다. 연호도 중국의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사건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고려 내부의 개혁 요구와 지방 세력의 성장, 그리고 불교적 왕권 강화에 대한 시대적 흐름을 반영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천 년 이래 대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었고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했다. 우리의 종교, 학술, 정치, 풍속 등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원인이 바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실패한 데 있다고 지적했다.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었다고 애석해 하기도 했다.
옛날 이야기만 꺼내면 손사래를 치는 젊은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대목이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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