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념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2026년 새해가 시작됐다. 많은 이들은 새해를 맞아 새로운 계획과 희망찬 다짐을 한다. 하지만 필자는 올해 그동안 쉽게 꺼내 들지 못했던 한 가지 난제를 마주하고자 한다.
사랑이 누군가와 관계를 시작하게 한다면 용서는 그 관계를 다시 살리는 것이 아닐까. 어느 책에서 용서란 나 자신을 지배하는 그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 했다. 이 말은 용서를 도덕적 의무나 종교적 요구 이전에 자유를 향한 결단으로 바라보게 한다.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나답지 못하게 만들고 쉽게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의 한 사건일 수도 있고 잊히지 않는 기억이나 특정한 사람일 수도 있다. 특히 그 대상은 나 자신보다 타인인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용서는 늘 어렵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도,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고 받는 일도 자존심을 건드리고 마음을 소모하게 한다. 때로는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삶의 어둠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용서가 없다면 우리는 끝내 자유로워질 수 없다. 분노와 원한을 붙잡은 채 살아간다면 그 어둠은 점점 우리의 삶 전체를 물들이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용서는 상대를 위한 행위라기보다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선택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억지로 용서해야 할까. 진심이 없는 용서에 의미가 있을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직 분노와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면 말로만 내뱉는 용서는 오히려 용서의 의미를 가볍게 만들 뿐이다. 용서가 되지 않을 때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충분히 시간을 갖자.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이성을 되찾을 때까지, 그 대상에 더 이상 과도하게 반응하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려보자.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감정의 바람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때까지 말이다. 힘은 억지로 빼는 것이 아니라 빠지는 것처럼 용서 역시 그렇지 않을까. 억지로 놓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기다림의 시간 안에서 본인은 이 한 가지를 기억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완전히 선하고 의로울 때만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우리 안에 단 1%의 선함, 1%의 용서에 대한 가능성만 있어도 그 가능성을 통해 자비를 일으키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다. 사도 바오로가 전하듯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부족함과 실패 속에서도 끝까지 책임지는 분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 27)는 말씀처럼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도 은총 안에서는 가능해질 수 있다.
용서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자유를 향한 길 위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마주해야 할 선택이기도 하다. 그 선택 앞에서 조급해하지 말고 스스로 단죄하지 말며 우리 안의 작은 가능성을 믿고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자유로워질 것이다. 2026년 새해에는 필자를 비롯해 모두가 자신을 지배하는 그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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